제목
    사과나무 껍질로 만든 잉크가 어떤 색과 느낌이었는지글자에게는 무척 친절했는지릴케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조금만 더 시간 달라고 조른 일곱 날과 일곱 면의 고독에 쓰여 있을 슬픈 것들을 부탁해야겠다    내 심장은 북국이 녹아내리면서부터슬픈 것도 없어지기 시작하였다이글루 안에 풀들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릴케가 만났던 여자들나에게도 이모들, 어느 날 시작된어머니의 형제들이 빙하의 족보 속에서난대림을 끌고 나왔다    …
 도시에 살면서 그 흔한 눈물그 많은 이별을 멀리하고 싶은 날 내 고향 화순으로 가리라.   그 옛날 아버지와 어머니우리 육남매가 오순도순 살았던 초가집 터에 다시 집을 지어놓고 마당에는 고추 상추 오이를 심고 울타리에 호박덩굴도 몇 개 올려새소리 바람소리를 벗 삼으며 등이 찹찹한 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신선놀음을 하리라.   제비가 날아와서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지지배배 지저귀면서 일가를 이루던 곳그 싸가지 없는 놈들이 사돈네 팔촌까지 데불고 와서는 빨랫줄에 나란히 …
 먹는 것이 걱정이고 입는 것이 걱정이고 자는 것이 걱정이다 가족이 걱정이고 이웃이 걱정이고 사회가 걱정이고 사는 일이 걱정이다 정치가 걱정이고 경제가 걱정이어서 나라가 온통 흔들리고 있다 눈을 씻고 봐도 나라를 맡겨놓은 수장들의 도끼자루가 모두 썩어 있다 금강산에는 일만 이천 봉우리가 있고 한라산에는 백록담이 있는데 집 한 칸 지을 땅이 없다 국회의사당에는 잡귀잡신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늘이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왕도(王道)가 하늘을 따를 때 나타난다는   …
 죄송합니다 세종대왕님 훈민정음을 지으신 오백일흔여섯 해 만에 말모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국어사전 이야기인데요. 돈도 안 되는 글을 왜 모으나 싶었는데 까막눈 김판수가 생전 처음 글을 읽으며 우리 훈민정음의 ㅎ 한글의 ㅎ이 큰 글자라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하더라고요. 우리말의 소중함에 눈을 떠가면서 말을 모으는 일에 힘을 보태는 판수한테서 우리말 우리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글이 금지된 일제 강점기에 말과 마음을 모아 사전을 만드는 일에 궂은일을 도맡았던 김판수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달아나…
    운주사에 들렸더니 와불이 누워있다. 또 다른 와불 하나 그 옆에 누워있다. 겨드랑 빈자리 들어 살그머니 누워본다.   와불이 고개 돌려 빙그레 웃어준다.나도 와불 따라 쑥스럽게 웃어본다.이제사 운주사 와불 미륵불이 되었다.      ▲운주사 와불  
     길이 없다. 동서남북 모든 길이 막혀 있다.   산들을 둘러 앉혀 병풍을 만들어 놓은 오래 된 무덤 하나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   아주 오래 갇혀 있던 갑갑함인 듯 우 우! 소나기 되어 달려오며 시원스런 소리를 지른다.   괜찮아! 길이 막혀있으면 하늘을 보면 되지 고개가 아프면 땅을 보면 되지   이곳에 오면 나는 물이 되니까 불이 되니까 바람이 되니까 자유로우니까   무덤 속에 있는 사람 가슴속에 있는 거 훔쳐보면 되…
      내가 아무리 가난해도나 이전에 누군가도오늘의 나처럼 가난했을 것이다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나 이전에 누군가도오늘의 나처럼 배가 고팠을 것이다내가 아무리 어두운 길을 걷는다 해도나 이전에 누군가도오늘의 나처럼 어두운 길을 걸었을 것이다​좁은 길 힘든 길가파른 길을 걷다보니이 세상에는 나 이전에아무도 걷지 않은 새 길이 없더라나와 비슷한 시기에여행을 떠난 사람들아!우리 마음까지 가난한사랑하는 사람들에게등 두드려 달래줌시로 손 한번 잡아주자 ▲이광희 作 ▲이광희 作…
    낡은 잠바 걸쳐 입다가 코에 익숙한냄새 안 것은내가 나를 맡고서다   늙을수록 잘 씻어야한다고 주문 건막내 지적대로 구석구석 나도 떴기 때문이다문풍지 속에서 핀 메주꽃코 박고 잘 떴다 할 사람 있겠지만   밤새 날 태워 넘어질 사람 어디 있을까모깃불 향나무 독에 떨어져 죽은제비 새끼다시 돌아올 꽃이 피었다   민들레가 피었다하얗게 벚꽃이 날고 있다참꽃, 제비들이향기 맡으며 돌아 와내 사는 낡은 처마에 흙을 붙여주면젖내 나는 손자 업고육신꽃   벽에 걸어두…
     내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눈뜨면 다시 오늘이다.   훌쩍 떠날 수 있게 날마다 임종을 준비한다.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고 나면 주위도 이내 평온하겠지   누군가의 가슴에서 몇 줄의 시가 살아남은들 떠난 후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글 한 줄에 매단 목숨 줄을 내려놓고 하늘을 보며 희죽 웃는다.     ▲이광희 作​ ▲이광희 作​ ▲이광희 作​ ▲이광희 作
     당신 닮아서 더 빨갛고, 채 노랗다   밤낮 둘이는 가려운 등 돌려대고별처럼 긁어주는 꽃 동무이순 넘겨놓고 알았지만천연스럽게 귀가 열려 서운한 말빨갛게 석류 알처럼 박혀입이 벌어지는데 잘 익었다 하더군   별것도 아닌 말 가지고 흔들면나도 가시달린 나문데꽃 속에 들어와 자고 가는 달혼곤히 삭힌 사랑을 어떡할 건가나 고흥 남자네가락동이 물씬거리는 유자 아닌가        
 가지 부러진 그 자리 잎이 지고 난 그 자리눈물이 지고 난 그 자리에서   모질게 피어나서 힘차게 향기를 내 뿜어주더니 아프다는 그리고 힘들다는 내색 한 번 없이 속 깊은 외로움을 잘도 견디어 내더니   오늘은 웬일로 안하던 짓을 한다. 입으로는 웃고 있으면서도 눈이 복잡하다      ▲이광희 사진/ 한세연 전속사진작가    
  아욱은 이슬이 멎거든 뜯으라하데, 여보채소라고 아무렇게나 뜯는 게 아닌가봐살림, 구단까지 하려면 공부가 많아야겠어먹는 사람 생각하면 아무 때나뜯으면 어때아욱을 생각하니 그렇겠지​   아욱국이 참 맛나네입이 즐겁고 덕분에 한 줄 더 청정하게 되었어, 여보가끔 줄기가 거시기하지만허투루 먹지 말라 넣었겠지아욱국 앞에 두고 함초롬 내린 이슬이 보이네머리칼 뿌리까지 하얗게 살아오는 동안아픈 곳이 많았지​   어제는 발이 땅 속으로 딸려 들어간다고손잡아 끌며 산책했잖은가당신 성한 곳은 말라버린 가…
     고추, 상추, 가지, 오이 모종을 사다가 심었는데 한동안 비가오지 않는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말라가는 것들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저절로 타들어 간다. 아침저녁 물을 흠뻑 주어도 물은 땅에 스며들지 않고 이랑 양옆으로 흘러가고 만다. 뿌리가 상하지 않게 호미로 단단한 흙덩이를 잘게 깨고 부순 뒤 물을 준다. 새싹들이 새파랗게 되살아난다.   나는 가뭄에 흙덩이처럼 딴딴하다 얼마나 더 마빡이 깨지고 부서져야 마음 밭에 한글 씨를 심을 수 있을까꽃을 피우고 …
    나는 돌상에서 무엇을 쥐었을까생일 때마다 팥단자 먹으면서도돌상 얘기는 듣지 못했다아버지는 징용 끌려가기 싫어흙칼 하나 들고 안면도 불탄개 어디쯤에서 황토 흙주무르는 토수로 지냈다아버지가 발라놓은 무너진 벽땜질하는 나를 쳐다보며누가 바른지 대강 알 수 있다는말에 흙칼이 펄쩍 뛰었다나는 아버지 돌상 얘기도 들은기억이 없다아버지는 흙칼 쥐고, 나는 책 쥐고 도망쳤을 뿐이다하지만누가 썼는지 대충 알 수 있다는말투로 나는 늙지 못하고 흙벽에 황소라고 쓴 낙서에서울고 있는 성난 소리만 밤마다 듣고 있다&n…
 태초에 단군은 우리를 품에 안고 내 나라의 얼 내 나라의 말 내 나라의 글로 정치를 하고 경제를 하고 사회를 하고 문화를 하여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세상을 밝히는 물과 불과 빛과 힘이 기쁨이며 설렘이며 사랑이며 행복이 인류의 보금자리 내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세상을 향한 가치 있는 삶도 가르쳐 주셨다.   눈과 비 뿌린 흔적 하나 없이 홀로 우뚝 솟아 빛을 모은 백두산아 산하를 갈고 닦은 소용돌이로 동·서·남·북 줄기차게 뻗어 내린 한라산아 만년동안 빚어온 금빛문화의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