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길 가다가 초록으로 물든 잎사귀 사이로유난히 눈길을 끌고 있는 나뭇잎을 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벌레가 뜯어 먹은 자국마다 핏빛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그 구멍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싸납쟁이 나 때문에 날마다 가슴 조이며 애면글면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가주름진 얼굴로 웃고 계신다.   아들아!추석이 몇 밤 안 남았다. 이 어메 눈 빠지게 허지 말고 안날 내려 오니라 이~   정다운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눈 오는 날 겨울 산을 오른다 잠자리 날개보다 가벼운 것들도 어께 위에 쌓이면 등을 휘게 하는가?   고집스럽게 꼿꼿하던 독야청청 푸른 솔이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없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지 끝에 사뿐 내려앉은 저 작은 눈발들을 못 이기고 비명소리를 지르며 목을 꺾고 만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뒷목을 만진다. 한 오십여 년 자리 잡은 오만과 편견이 통증도 없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 눈감고도 보이는 맵짠 길들이 얼음장 밑을 흘러가면서 한수 가르쳐 준다.   작고 사랑스러운…
  풀밭에 누워 구름을 본다.   나 어렸을 적에 굴뚝에서 연기가 밥 냄새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언덕 너머에서 땅거미가 스멀스멀 올라오면   “아들아! 밥 먹어라”   하고 골목마다 찾아다니던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싣고 푸른 하늘 저편 남쪽으로 흘러간다.   저 구름의 심정은   그 옛날 사무치게사랑을 받아본 자만이 긴 방랑 끝에 처절하게 눈물을 흘려본 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날   나를 울리고 있…
 여름밤에는 시를 쓴다.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보리밥을 먹었다고 쓰고 그 옆에서 모깃불이 토닥토닥 타들어 갔다고 쓴다. 엄마 젖꼭지를 물고 동생이 잠들었다고 쓰고 쉰내 나는 엄마 적삼 밑에서 별빛도 달빛도 잠들었다고 쓴다. 삽살개가 잠들고 온 마을이 잠들었을 때 살며시 대문을 빠져나와서 깨댕이 친구들을 만났다고 쓴다.   친구들아!풀숲에 숨어서 천근만근의 고독으로 가을을 부르고 있는 저 귀뚜리의 눈물을 어째야 쓰까 이어린 시절 수박 서리 참외 서리를 하면서 날을 보냈던 가슴속 깊숙하게 묻어놓은 그리움이…
수국을 보고 있으면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그립다 숭어리 숭어리 핀 꽃이 어머니 품속 같아서 성큼성큼 꽃밭 속으로 들어간다. 꽃잎 사이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보이고 고향 집을 혼자 지키고 계신 어머니가 보인다. 삭막한 도심 한가운데서도 손 내밀면 금세소원이 이루어지게 하는 꽃  향수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오늘은 내 안에서 그 옛날 다정했던 동기간의 웃음이 무더기무더기 피어난다.  
    이 얼마나 맑고 밝고 환한 말인가!​그 어린 시절 누이가 빨랫줄에 무명 이불을 빨아 널었듯이   오늘같이 수은주가 삼십 도를 웃도는 무더운 여름   우~ 소리롤 내며 천둥 번개도 치며 소나기 한 줄 금 시원스럽게 쏟아지고 난 후에하늘 저편에서 빛나는 쌍무지개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말인가!  ▲김태영 영화감독 작품           
   팔베개를 하고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우리 어머니 코고무신 같은정겨운 초승달이나를 내려다본다 내일은 기차표흰 코고무신한 컬레 사서 고향 집에 홀로 계신 어머니께갖다 드려야겠다   ▲흰 코고무신이다.
 대밭에 가면한해 한 해 인생을곧고 바르게 살아온 너를 만난다걸어온 길이 부끄럽지는 않으나외모에서 풍기는 향기조차 훤칠하지만마디 마디마다 옹이가 박혀있어서목울대에 울음이 가득 차 있어서나를 보는 듯이 안쓰러워서시간이 날 때마다 소박한 마음으로너를 찾아오는 것이다.네 앞에 서 있으면생각이 옹졸하여 서둘러분개한 일들이 무안해질 때가 있다. 대나무야! 이유는 불문이다.너는 나고 나는 너니까귀하고 소중하니까그 자리에 그대로  
    사과나무 껍질로 만든 잉크가 어떤 색과 느낌이었는지글자에게는 무척 친절했는지릴케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조금만 더 시간 달라고 조른 일곱 날과 일곱 면의 고독에 쓰여 있을 슬픈 것들을 부탁해야겠다    내 심장은 북국이 녹아내리면서부터슬픈 것도 없어지기 시작하였다이글루 안에 풀들이 자라났기 때문이다    릴케가 만났던 여자들나에게도 이모들, 어느 날 시작된어머니의 형제들이 빙하의 족보 속에서난대림을 끌고 나왔다    …
 도시에 살면서 그 흔한 눈물그 많은 이별을 멀리하고 싶은 날 내 고향 화순으로 가리라.   그 옛날 아버지와 어머니우리 육남매가 오순도순 살았던 초가집 터에 다시 집을 지어놓고 마당에는 고추 상추 오이를 심고 울타리에 호박덩굴도 몇 개 올려새소리 바람소리를 벗 삼으며 등이 찹찹한 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신선놀음을 하리라.   제비가 날아와서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지지배배 지저귀면서 일가를 이루던 곳그 싸가지 없는 놈들이 사돈네 팔촌까지 데불고 와서는 빨랫줄에 나란히 …
 먹는 것이 걱정이고 입는 것이 걱정이고 자는 것이 걱정이다 가족이 걱정이고 이웃이 걱정이고 사회가 걱정이고 사는 일이 걱정이다 정치가 걱정이고 경제가 걱정이어서 나라가 온통 흔들리고 있다 눈을 씻고 봐도 나라를 맡겨놓은 수장들의 도끼자루가 모두 썩어 있다 금강산에는 일만 이천 봉우리가 있고 한라산에는 백록담이 있는데 집 한 칸 지을 땅이 없다 국회의사당에는 잡귀잡신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늘이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왕도(王道)가 하늘을 따를 때 나타난다는   …
 죄송합니다 세종대왕님 훈민정음을 지으신 오백일흔여섯 해 만에 말모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말 국어사전 이야기인데요. 돈도 안 되는 글을 왜 모으나 싶었는데 까막눈 김판수가 생전 처음 글을 읽으며 우리 훈민정음의 ㅎ 한글의 ㅎ이 큰 글자라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하더라고요. 우리말의 소중함에 눈을 떠가면서 말을 모으는 일에 힘을 보태는 판수한테서 우리말 우리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글이 금지된 일제 강점기에 말과 마음을 모아 사전을 만드는 일에 궂은일을 도맡았던 김판수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달아나…
    운주사에 들렸더니 와불이 누워있다. 또 다른 와불 하나 그 옆에 누워있다. 겨드랑 빈자리 들어 살그머니 누워본다.   와불이 고개 돌려 빙그레 웃어준다.나도 와불 따라 쑥스럽게 웃어본다.이제사 운주사 와불 미륵불이 되었다.      ▲운주사 와불  
     길이 없다. 동서남북 모든 길이 막혀 있다.   산들을 둘러 앉혀 병풍을 만들어 놓은 오래 된 무덤 하나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   아주 오래 갇혀 있던 갑갑함인 듯 우 우! 소나기 되어 달려오며 시원스런 소리를 지른다.   괜찮아! 길이 막혀있으면 하늘을 보면 되지 고개가 아프면 땅을 보면 되지   이곳에 오면 나는 물이 되니까 불이 되니까 바람이 되니까 자유로우니까   무덤 속에 있는 사람 가슴속에 있는 거 훔쳐보면 되…
      내가 아무리 가난해도나 이전에 누군가도오늘의 나처럼 가난했을 것이다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나 이전에 누군가도오늘의 나처럼 배가 고팠을 것이다내가 아무리 어두운 길을 걷는다 해도나 이전에 누군가도오늘의 나처럼 어두운 길을 걸었을 것이다​좁은 길 힘든 길가파른 길을 걷다보니이 세상에는 나 이전에아무도 걷지 않은 새 길이 없더라나와 비슷한 시기에여행을 떠난 사람들아!우리 마음까지 가난한사랑하는 사람들에게등 두드려 달래줌시로 손 한번 잡아주자 ▲이광희 作 ▲이광희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