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소감] 문기주/ 한맥문학 신인상 등단(2021년 2월호)

강지혜 2021-01-27 (수) 10:52 3년전 663  

00937544f4367e55c938c2c046efa2e5_1611712249_1793.png
문기주 시인

 


내 고향 화순은 사시사철 풍광이 아름답다. 시인 묵객이 아니더라도 시 한편 쓰고 싶고, 시조 한수 읊어보고 싶은 곳에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글 쓰는 사람을 더 좋아했다.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가지 아래에 있고(무등산고송하재,無等山高松下在),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구나!(적벽강심사상류赤壁江深沙上流)”라는 시를 쓴, 내 고향 적벽 절경에 취해서, 화순에 뼈를 묻은 김삿갓을 좋아했다.

“해맑은 가을모래 오솔길에 뻗었는데/ 동문의 푸른 산은 구름이 피어날 듯/ 새벽녘 시냇물엔 연지빛이 잠기었고/ 깨끗한 돌벼랑은 비단무늬 흔들린다//”는, 화순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와서 16세 때 ‘적벽강 정자에서 노닐며’라는 시를 썼다는 다산 정약용도 좋아했다.

나는 일찍부터 방랑벽이 심했다. 밤낮없이 산·들·내를 오르내리며, 화순의 절경에 흠뻑 취하곤 했다. 벚나무들이 만개한 봄이면 드넓은 세량지를 온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여름이면 시원하게 만년폭포 물줄기를 타고 강물로 흘러내렸다. 울긋불긋 단풍이 든 가을에는 고즈넉한 쌍봉사가 되어 침묵으로 일관했고, 겨울이면 백야산 설경이 되어 장대한 풍경이 되었다. 한마디로 고향의 산천초목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했다.

자연과 함께 있으면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성불사 깊은 밤’도 목청껏 불렀다. 가슴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노래 만든 사람 시름이 많기도 많구나/ 일러 다 못 일러 불러나 풀었단 말인가/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보리라”는 신흠의 시조를 만났다.

가슴이 뻥 뚫렸다. 시조란 시조는 모조리 읽었다. 그리고 패러디를 시작했다. 하지만 3장 6구 45자 이내 외로 운율에 맞추어야 하는 시조 쓰기는 쉽지 않았다.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 맴도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종이 위에 수놓았고, 그것들을 다시 입에 넣고, 곰삭을 때까지 음미했다. 어느 날부터 허기지던 배가, 임신한 여자처럼 불러오기 시작했다.

자식을 낳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시조에 굶주리고, 시에 굶주린 이들에게, 단 한 숟가락이라도 글을 먹이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혔다. 먼 옛날 시흥에 취한 선비들이, 찻잔 속에 하늘의 달과 별을 친구로 불러들였던 것처럼. 나도 자연을 벗 삼은 이들과 함께, 만년 문학청년의 길을 걷고 싶었다.

쉴 틈 없이 펜을 잡다보니, 손가락 끝에서 단내가 난다. 아직은 여물지 못한 글을 당선시켜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여기까지 응원해준 가족들에게 영광을 돌린다. 더 높고 더 넓은 낭만을 위하여, 행보하겠다.

00937544f4367e55c938c2c046efa2e5_1611712299_0024.jpg
​시인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