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받아온 기운 없이는
나를 미끄러지게 못했을 것이다
한나절 덜어내고 남은 농로에서
자동차 바퀴 하나가
몹시 흔들리다 간신히 섰다
노인이 사는 응달 집
간척지에서 발라낸
길이 기다랗게 야위었다
보면 볼수록 겨울 닮은
노인네 얼굴
눈물에 긁히고 남은 자리로
나는 말끝마다 미끄러졌다
수십 마지기 간사지에
열 남매의 아버지, 이제는 홀로
등불 켜야 한다
밤이 제일 긴 동짓날 나는
난생 처음 새벽이 오기까지
뜬눈으로
고스란히 미끄러져 보았다
<정홍순/ 시인, 한글세계화운동연합 한국어지도교수>
▲정홍순 作
[시작노트]
어느 겨울 작은아버지 뵈려고 가다가 눈길에 자동차가 미끄러졌습니다. 미끌미끌 눈길을 헤치고 홀로 계신 작은아버지를 뵙고, 사실 그날 밤 서산 백순이 형 집에서 꼬박 잠 못 들고 날을 샜습니다.
저를 많이도 사랑해주시고, 따뜻한 말 한마디 고루 나눠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농수용차로 백순이 형하고 농짝 싣고 고흥 포두까지 오셔서 살펴주시고 가신 분이 작은아버지십니다.
이 조카는 목사 일을 보면서 시인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삶의 자양분을 주시고 아버지, 어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한 분씩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군요.
올해도 새 시집이 출간됩니다. 《바람은 갯벌에 눕지 않는다》는 제목의 시집에 작은아버지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위에 적어놓은 ‘응달’입니다. 작은아버지 영전에 이 시를 바칩니다.
작은아버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평안히 쉬십시오.
▲정홍순 作
<2020년 6월 24일 조카 정홍순 배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