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 칼럼] 석류열매 익어가는 고흥바닷가에서

관리자 2019-08-22 (목) 09:51 4년전 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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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칼럼>

 

서늘한 바람이 일고 있다. 폭염과 열대야로 몸살을 앓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다. 아직까지도 폭염은 기승을 부리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역시, 자연의 섭리는 신비롭다. 기후변화를 의식한 탓인지, 더위도 추위도 우리에게는 고달픈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더위가 물러가고 있는 이 계절 앞에 고흥 땅은 벌써부터 풍년소식이다.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는 해창만에서부터 석류열매 익어가고 있는 외로 바닷가까지 풍성함이 전해지고, 농어민들의 마음을 실은 바닷바람도 흥을 돋운다. 더욱이 고흥군 과역면 노일리 외로 마을 바닷가는 저녁풍경이 아름답다. 서쪽하늘가로 저녁노을이 물들어오면 갯벌 한가운데로 불기둥이 솟아나고 바다는 온통 붉은 빛이다. 하루를 소일한 태양의 몸빛이 서서히 소멸하면서 그려지는 광경은 아름다움이다. 게다가 산과 들녘은 붉게 익어가는 석류열매로 마을까지 붉게 타고 있다. 어쩌면 우리 인생가을을 연상시키는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익어간다는 낱말이 새롭다, 참 좋은 뜻을 지닌 단어다. 원음의 익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 자라서 여물다여러 번 겪어 보아 몸에 익숙하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런 까닭인지, 예부터 가을은 익어가는 계절이라고 표현했다.

 

석류열매가 익어가는 고흥바닷가와 외로 마을이 익어가는 저녁풍경은 한마디로 훌륭한 자연작품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이 그려놓은 풍경화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서 즐겁고, 그 풍경의 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마저도 황홀경이다. 아니다. 콧노래가 나오고 시를 떠올릴 수 있는 황금계절의 가을풍경 그대로다.

 

우리의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하다. 연두이파리가 돋아나는 봄을 시작으로 신록이 우거진 여름을 지나면 형형색색의 빛을 토하는 가을에 접어든다. 하지만 우리인생가을은 서글픔이 밀려오는 황혼기다. 그 가을 앞에서 익어간다는 낱말과 언어는 잘 어울리는 표현인성 싶다.

 

사실 필자에게 있어 고흥은 잊을 수 없는 고장이며 제2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정으로 맺은 友林(친구의 숲)친구가 있다. 13살의 나이에 만난 우림은 필자의 둘도 없는 친구로 아직까지 눈 한 번 붉혀 본적이 없다. 그 당시 우림은 고흥군 과역면 노일리 외로 마을 토박이로써 순천으로 유학을 왔다. 중학교 1학년부터 자취를 했으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모범생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와도 뛰지 않고 좌측통행은 물론 예의범절과 풍습을 잘도 지키는 도덕학생이었다.

 

우림이 살아온 삶은 상록수적인 삶이었다. 그는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로 정직한 삶을 꾸리려는 정의구현의 선봉자였다. 아마도 고흥에서는 석류 왕. 이라는 칭호와 함께 석류의 아버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가 외로 마을을 지키기 위한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마을바다를 지키는 일에서부터 잡동사니의 잡일까지도 그의 육신이 따르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았었다. 지금은 피눈물 나는 분함과 억울함이 삭혀져 석류 빛으로 익어가고 있지만 그 푸르고 푸른 시절이 붉게 익어가는 가을을 맞고 있다.

 

그는 석류줄기를 삽목해서 성목으로 가꾸며 고흥에 적합한 품종을 개량하기까지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늘에 새콤달콤한 고흥석류를 개발한 장본인이다. 그가 고향에 쌓아 놓은 업적은 부지기수다. 하지만 그의 성품은 내성적으로 자신만의 공간에서 삭히고 묵혀두는 사고방식이다.

 

사람역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표현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듣기에도 좋을 성 싶다. 그래서일까? 우림이 익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참으로 곱다. 그의 삶은 석류꽃처럼 영롱하고 석류열매마냥 탐스럽다. 다시 말해 그가 익어가는 모습은 붉게 익는 석류열매보다도, 서쪽하늘에 영롱한 빛으로 물드는 저녁노을보다도 더욱 더 찬란하고 아름답다.

 

잡다한 사연이 익어가고 있는 인생여로에서 잠시 여유를 가져봄이 좋을 성 싶다. 그 중에서도 외로 마을을 떠나지 못한 그리움과 아쉬움에 대한 여운은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것은 곧 고흥사랑이고 친구사랑이다. 아무리 고흥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절친 없는 고흥은 무의미하다. 정을 먹고 살아가는 인간사회에서 공통분모는 인간관계다.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랑을 나누면서 속정이 석류 빛과 노을빛처럼 익어가는 사회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