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순 칼럼] 동심을 외면하는 사회

정홍순 2018-11-13 (화) 10:13 5년전 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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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순/ 시인, 한세연 해외선교 지도교수>

 

“왜 오늘 뒷산에서/불쑥 나타난 거야./깨물려고 그러니?/···/말해두지만, 아빤/네 껍질을 벗길 수도 있어./아마 널 먹을 거야./뭐든 먹거든” 송현섭의 ‘뱀에게’라는 동시 일부를 옮겨본다.

이 시는 뱀에게 말을 거는 동시다. 이런 동시도 있구나 싶어 몇 번이나 읽었다. 급기야 자기 자신에게 안심시키는 말로 읽혀지는 매력의 반전이 들어있는 이런 동시는 처음 본다. 어린이를 위한 동시지만 어른들을 위한 시임에도 틀림없다. 오랜만에 참 재미있는 시를 읽으며 동심의 날개를 펴본다.

최근 교수들이 뽑은 ‘다시 읽고 싶은 책’ 1위에 ‘성경’이 선정되었다. 교수신문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함께 읽는 2018 책의 해’를 맞아 교수 405명을 대상으로 독서실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경이 4.9%의 지지를 얻으며 다시 읽고 싶은 책 1위에 꼽혔다고 보도했다.

이번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 ‘삼국지’ ‘논어’ ‘토지’ 등 고전이 2∼4위에 선정되었는데 서울대 국문과 방민호 교수는 “근본적이고 고전적인 세계에서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려는 지식인 집단의 고민이 엿보인다.”고 분석하였다.

선정 톱10 가운데 ‘어린왕자’(생텍쥐페리)는 10위에 올랐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도 잘 알려진 어린왕자는 인간이 고독을 극복하는 과정과 정신적인 연대감, 꿈의 세계를 현실과 연결시키고자하는 환상적인 여운이 남는 책으로 180여 개 국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는 책이다.

송현섭 동시의 뱀은 뒷산에 있는 꽃뱀일거야로 읽힌다면 어린왕자에 나오는 뱀은 보아뱀으로 인생에 대한 비판을 시도할 수 있는 동심(시)으로서 자아의 성찰과 시대적 비판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는 현학적인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동심(童心), 어린이의 마음 혹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이 어떻게 하면 악마의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마음에 악마가 자라게 되었을까. 오늘날 사회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에 수없이 던져지는 물음이다.

왜 어른들은 순수하면 약자가 되고 바보가 되는가. 달걀 1개를 풀어 100명의 어린이에게 먹일 수 있었다는 것은 가히 오병이어 같은 기적적인 이야기다. 동심을 받들어 사는 사람들이 핀잔 들을 이유 없는데도 말이다. 양심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까지 폐해를 입어서는 안 될 사안이다.

작금 어린이를 위한 사설기관들이 폐원신청을 앞 다투어 벌이고 있는 교육무능시대가 자행되고 있음을 주시하고 있는 바다. 스스로 작폐하고 나서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폐원하는 사람들도 이 와중에 늘고 있다.

7차 교육이든, 누리교육이든 유아·아동교육은 백년대계를 설정하는 기초 이상의 근본교육이다. 한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 정부와 기관과 부모가 삼위일체로 시간, 공간, 물질, 정신이 부합되어질 때 양질의 교육과 사명을 온전히 이행할 수 있는 데 서로의 이기만 앞서다 보니 급기야 엎어지고만 사태이다.

다시 방교수의 분석처럼 지식집단의 고민이 근본과 고전에서 해결점과 가르침을 구한다는 말을 새겨본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배워야하고, 고전 된 작품들을 통해 혜안의 눈이 열어지기를 말이다. 꽃뱀을 만난 뒷산에서, 코끼리를 삼키는 보아뱀이 있는 사막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첨단으로는 풀을 수 없듯이 말이다.

동심을 원심이라고 하면 어떨까. 동그란 마음(圓心)이라 해도 좋고, 원래의 마음(元心)이라 해도 좋은 마음 말이다. 필자가 이순을 바라보면서 제일 크게 배운 것은 동심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근본을 잊어버리고 돈벌레 같이 사는 생과 부대끼다보니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것임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즉흥적이고 즉물적인 소비 지향적인 삶을 반성하기에 아직은 늦지 않다고 본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어린아이를 만나보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세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아름다운 마음이 동심 아니던가. 한 번 머릿속에 박힌 생각대로만 살려고 하는 상상이 빈곤한 기계적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깨쳐야 한다. 정말 깨쳐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살고, 종교가 살고, 가정이 살 수 있다. 이제 필자는 구원(동심)을 상실한 인간 군상에서 참 인간을 희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