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있는 풍경] 알 수 없어요/ 시. 한용운 사진. 이광희

여운일 2020-02-03 (월) 12:10 4년전 747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집. 님의 침묵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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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희

 

이 시는 자연의 신비로운 아름다움 뒤에 있는 절대자에 대한 동경을 간절한 물음과 기원의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윤회와 참된 가치를 향해 정진하는 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시는 의문형으로 끝나는 몇 개의 행이 계속되다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에 와서 일단 커다란 변화를 보여 주고 다시 의문형으로 종결된다.

 

14행에서 ''은 나에게 점점 가까이 느껴진다. 처음에 님은 발자취 소리만 나다가 먼 빛으로 얼굴을 보이고, 좀더 가까이 다가와서 입김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귓가에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것은 매우 밝은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5행에서는 님과의 이별의 순간이 온다. 저녁의 침침한 속에서 이루어진다. 비극적인 순간이 장엄한 시처럼 느껴진다.

 

6행에서 님은 사라지고 나는 어두운 ''에 홀로 남겨진다. 그 밤 속에 침몰하지 않기 위해 나의 가슴은 약한 등불을 켜게 된다. 그 등불은 절대적인 님의 존재에 비해서, 또 님과의 이별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당장은 '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듯이, 나의 가슴은 끊임없이 타올라, 그 등불이 언젠가는 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비추어 줄 횃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에스프리 발행인, 시인 박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