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해/ 시 박두진. 사진 이광희

관리자 2020-02-02 (일) 10:48 4년전 772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청만사, 1949>

 

일제 말기 암울한 세계에 갇혀 있던 젊은 시인이 8·15광복이라는 환희를 체험하고 용솟음치는 가락을 얻어 이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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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희

 

1연에서는 산문적 율조 `해야 솟아라'라는 말이 수식어를 덧붙여 가며 반복된다.

 

해는 산 너머서 어둠을 불태워 먹고 이글이글한 빛과 천진난만한(애띤) 모습으로 떠오를 광명의 원천이다. 자연의 해가 아니라 어두운 시대를 한꺼번에 밝히는 새로운 세계의 빛을 의미한다.

 

2연에서는 빛을 기다리는 괴로운 모습이 보인다. 번민과 비애로 가득한 골짜기의 어두운 달밤이 싫다.

 

3연에서는 해가 찾아 왔을 때 누리게 될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밝은 빛 아래 티 없이 맑은 자연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것이다. 청산, 사슴, 칡범, , , 짐승'들이다.

 

시인이 그리는 이상세계는 단지 조국의 해방이라는 역사적 의미에서 그치지 않고, 기독교적 상상 속의 낙원이다. 인간 사회는 물론 자연의 세계에서까지, 일체의 갈등이 해소된 경지이다.

 

이 작품은 8·15 해방이라는 벅찬 기쁨 속에서 민족의 웅대한 기대와 민족의 이상을 구가하던 시기에 씌어졌다. ''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광복의 기쁨을 제시하는 한편, 어둠이 걷힌 '청산(靑山)'에서 광명한 조국의 미래사, 민족의 낙원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시인의 뜨거운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문학에스프리 대표, 시인 박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