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읽는 편지] 가을날/ 릴케

김인수 2018-10-17 (수) 06:14 5년전 1361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으소서.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소서.

 

마지막 과실을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 자지 말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리 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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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산(仁)편지중에서/ 김인수 시인. 육군훈련소 참모장 준장>

 

문을 열고 길을 나서니 바람이 달고 시원합니다. 탱글탱글하던 푸름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빨갛게 물들어가는 고추도, 노랗게 익어가는 벼들도 따사롭습니다.

오늘따라 뺨에 와 닿은 바람이 시원합니다. 서늘합니다. 저만 느끼는 감정이 아닙니다. 나무들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들이 저마다 가지가지를 흔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어미 소가 자신의 품에서 새끼를 멀리 떠나보내듯이, 나무들도 낙엽을 떠나보낼 채비를 하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렇듯 자연도 사람처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희들끼리 서로 만나고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놓고 이별을 준비하는 듯합니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참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자연이 전하는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아침입니다.

날씨가 많이 삭막해졌습니다. 모기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는 간곳이 없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들판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한낮의 햇볕은 오늘도 따갑겠지요. 계절의 엄연한 순행을 드러내는 때입니다

 

유난히도 길고 길었던 여름이 자리를 비켜주자마자, 가을도 곧 떠날 때가 된 것입니다. 세월에 장사 없고, 시간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이죠. 이게 우리가 말하는 자연의 이치요, 섭리인 것입니다. 계절은 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를 찾아와 가르쳐 줍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순환'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좋을 수만은 없고, 늘 나쁠 수만은 없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은 일도 있고,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 순환의 삶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모든 것을 늘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때가 되면 절로절로 저절로 고개를 숙이며 여물어가는 가을처럼, 우리네 인생도 고개를 숙이며 살아가는 것, 이것뿐입니다.

 

 

<가을날의 작가소개/ 릴케>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2.4 ~ 1926.12.29)는 독일의 시인이다. 프라하에서 출생했다. 철도회사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고급관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6~1890년까지 아버지의 뜻으로 장크트푈텐의 육군실과학교를 마치고 메리시 바이스키르헨의 육군 고등실과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시인적 소질이 풍부한데다가 병약한 릴케에게는 군사학교의 생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견디기 힘들었다.

 

1891년에 신병을 이유로 중퇴하고 말았다. 그 뒤 20세 때인 1895년 프라하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문학수업을 하였고, 뮌헨으로 옮겨 간 이듬해인 1897년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알게 되어 깊은 영향을 받았다.

 

1899년과 19002회에 걸쳐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한 것이 시인으로서 릴케의 새로운 출발을 촉진하였고, 그의 진면목을 떨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로뎅의 비서였던 것이 그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 같은 대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