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쓴 글] 자반고등어/ 이훈우

이훈우 2018-10-15 (월) 17:05 5년전 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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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우/ 일본동경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본부장>



내 기억 속에 어머니라는 존재가 자리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중학교 때 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1970년 처음 전기가 들어온 시골에서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났다. 자라면서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어머니의 기억이 별로 없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때까지는 주로 형님들과 별채에서 생활했고 밥도 부모님과 따로 먹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5형제 중의 맏이신데, 삼촌들도 모두 아들, 딸들을 많이 낳아서 우리 집에서 32명이 함께 생활한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집이 아니라 작은 성이었던 것 같다.

머슴까지 온 가족을 합하면 50명도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집이었으니까…. 부모님은 나에게 있어 늘 하느님 같은 존재셨다. 명절이나 집안의 큰 일이 있을 때에나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평소에는 감히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두렵고 높으신 존재이셨다.

나에 대한 거의 모든 일들은 형님들 선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중학생이 되고서야 겨우 부모님과 조금씩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로 이웃집 모내기를 하던 중학교 1학년 때의 어느 초여름 토요일이었다. 난 당시 8㎞도 넘는 읍내 중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몸에 땀이 베일 정도로 달리다시피 왕복 2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였다. 그 날은 마침 어머니께서 모내기 품앗이를 하시던 곳이 내가 하교하는 길에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일하시던 사람들이 논두렁에 모여 앉아 점심을 드시고 계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 입도 들지 않으시고 나를 기다리시다가 그 밥을 내게 내미셨다. 평소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자반고등어 반찬을 아들에게 먹이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스러워진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해 도망을 쳤다. 뻔히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으면서…. 아침부터 고된 일을 하신 배고픔도 참으시며 아들에게 자반고등어 맛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을 몰라주는 아들이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나는 요즘도 고등어 반찬을 보면, 자반고등어를 얹은 밥 한 그릇을 나에게 내밀며 어서 먹기를 재촉하시던 그 때의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리고 어머니라는 단어를 떠 올리면 생각나는 가슴 짠한 많은 경험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중학교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축구가 유행했었다. 주로 동네에서 큰 일이 있어 돼지라도 잡으면 오줌보는 동네 아이들의 차지였다. 돼지 오줌보를 잘 손질해서 바람을 넣어 축구공으로 사용했었으니까 말이다. 혹시라도 잘 못 차서 터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아이는 온 동네 아이들의 욕을  먹어야 했다.

그런 어려운 시절에 어머니는 가죽으로 된 진짜 축구공을 아들에게 사 주고 싶어 그 힘든 농사일을 마치시고도 새벽까지 홀치기를 하시며 축구공 값을 모으셨다. 홀치기 한 필에 200원, 축구공은 2,000원을 하던 시절이었고, 홀치기 한 필을 완성하려면 3주 정도가 걸렸다. 넉넉잡아 예닐곱 달은 고생해야 공 하나를 살 수가 있었다.

아들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해 주시려던 나의 어머니! 밤늦게까지 홀치기를 하시다가 잠이 오면 약 오른 고추를 골라 잡수시며 애써 잠을 쫓으시던 당신의 모습을 저는 기억합니다. 어두운 ‘호롱불’ 밑에 웅크려 애써 졸음과 씨름하시며 점점 작아져만 가시던 당신의 모습이 지금에서야 자꾸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당시는 동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동장에게 알리고, 동장이 시간 있을 때 읍내 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했었다. 그런데 당시 동장이 내 출생을 몇 년 동안 잊어버리고 동생이 태어나서야 내가 신고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난 3년이나 늦게 출생신고가 되었다. 당시는 호적관계가 불분명했던 관계로 학교는 또래들과 같이 다녔다. 3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한 것이다.

나이 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게 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당시는 공업고등학교가 인기가 있었다. 국가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공고도 많았다. 나도 중학교를 마치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고에 진학을 희망했는데, 자격이 안 되어서 진학을 못했었다. 호적상의 나이로 6학년이어야 할 학생이 고등학교에 들어간다니 당연히 나이가 맞지 않을 수밖에…….

당시 그 공고는 누구나 원하는 일류 공업고등학교로 전국의 각 중학교에서 전교 1등만이 추천을 받을 수 있었고, 최종 시험에 합격하고 졸업하면 몇 년간 하사관 자격으로 지정 업체에서 대체 복무를 해야 해서 나이 제한이 있었다. 당시 어머니는 모두가 꿈꾸는 선망의 고등학교라 나이를 원래대로 고쳐보시겠다고 법원이다 동사무소다 하루를 멀다하고 그 먼 길을 뛰어다니셨다. 시골에서 아무 것도 모르시는 당신이 재판을 2번이나 신청하기도 했었다. 결과는  모두 ‘이유 없음’으로 기각이 되었지만…….

"나,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 갈래요. 공고 가는 것보다 더 성공할게요."

라고 드린 말씀에, 어린 나이에 우리 아들 대견스럽다고 침이 마르도록 온 동네 자랑을 하시던 나의 어머니!

늘 맛나고 귀한 것들은 자식들 앞으로 내밀고, 맛없고 천한 것만 드시던 당신을 저는 지금에서야 떠올립니다. 

 ‘지발 너거들은 땅 파먹고 살지 말거래이….’

그 시골의 10남매가 지금은 모두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당신의 뜻대로 잘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학교라는 곳을 가 보지도 못했으면서 맨주먹으로 10남매를 빠짐없이 대학까지 보내주셨던 나의 어머니!

편하게 모시게 될 형편이 될 무렵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좀 편하게 모실 수 있었는데…….
이제 좀 잘 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제 좀 쉬실 수 있었는데…….

3일장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이제 겨우 갓 쉰을 넘기셨는데!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나리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않았었다. 늘 같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와 같은 나이가 된 지금에서야 세상을 떠난 그 때의 일들이 점점 실감이 나고 가슴이 아파 와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서럽게 우는 날이 많아졌다. 요즘은 고등어만 보아도 눈물이 난다.

나는 요즘 대학생원생인 아들과 대학생인 딸을 키우고 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10남매를 키우셨던 어머니를 생각한다.‘둘이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을 키우셨을까…?’

오늘도 나는 아무도 몰래 눈물을 훔친다.
어머니…!  

​<이훈우/ 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동경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