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쓴 글] 아버지의 눈물/ 이훈우

이훈우 2018-10-10 (수) 14:20 5년전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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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우

일본동경한국학교 교감선생님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본부장> 


‘너 엄마는 여서 살고, 난 안동으로 갈라칸다. 너거들은 누 따라 갈래?’
‘엄마요!’
‘….’
‘그러며, 내가 여서 살고, 엄마는 안동 가면 누구캉 살래?’
‘엄마요….’
‘….’
슬픈 표정으로 하늘만 쳐다보시며 속으로 울고 계시던 그 때의 아버지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요즘은 자꾸만 그 때의 아버지 눈물이 보인다.

우리 집은 읍내에서 버스로 두 시간을 구불구불 들어가, 다시 꼬불꼬불 산길을 1시간이나 더 걸어야 도착하는 하늘 아래 끝동네였다.

나는 10형제 중 9번째로 태어났다. 위로 8명의 형들이 모두 도시로 공부하러 떠나고 집에는 나와 동생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네 식구가 머슴들과 같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요즘의 특용작물 재배와 달리 당시의 논농사 일이라는 것이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모두 끝이 난다. 어른들은 겨울 동안은 휴식을 취하신다.

오늘도 아버지는 이웃집 사랑방에 동네 어른들과 밤을 지새우시고 아침밥 먹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참을성에 한계가 오면 늘 내가 아버지를 모시러 간다.

‘아부지요! 엄마가 아침 무라 카는데요…?’
‘….’

웃고 떠드는 소리에 아버지는 내 말을 듣지 못하신다.

‘아부지! 엄마 진짜 열받았다카이요, 퍼뜩 가이시더!’

그래도 아버지는 반응이 없으시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어른들은 자주 사랑방에 모여서 밤새워 이야기꽃을 피우신다. 돈을 얼마씩 모아서 주전부리도 하시면서. 내년 농사를 위해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는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사랑방에 가신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번씩 다투신다. 멍석도 짜야하고, 가마니도 짜야하고, 새끼도 꼬아야 내년 농사를 준비할 수 있는데, 사랑방에 정신을 빼앗긴 아버지가 못마땅하신 것이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늘 나를 보내시곤 하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내 말을 듣지 않으신다.

오늘도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시 저녁때가 되어서야 들어오시는 아버지랑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아버지는 우리 두 형제를 불러놓고 누구랑 살 것인가를 묻고 계신다. 그냥 울고만 있을 걸.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을 걸…….

너무 빨리 너무 강하게 엄마랑 살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후회를 했다. 그리고 그 때의 슬퍼하시던 아버지의 표정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상하게 많이 다투시던 그해 겨울부터 어머니는 아프시기 시작해서 이듬해 내가 5학년이 되던 여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더 이상 계시지 않는 다는 것이 현실로 와 닿지 않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야 한 번씩 가슴이 미어지도록 답답해지고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진다. 살아계실 때 잘 해 드릴 걸, 바보처럼…….

그 해는 부쩍 어머니와 아버지가 많이 싸우셨던 것 같다. 아마도 서로 정을 떼시려고 그랬나 보다. 옛 어른들의 말에, 돌아가실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하시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해 겨울에는 참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주 다투셨던 것 같다. 그 때 내동생과 나는 늘 어머니 편을 들었다. 3 : 1로 밀린 아버지는 언제나 말없이 밖으로 나가곤 하셨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일장을 치렀다. 나도 아버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지막 관을 땅속에 넣을 때서야 아버지께서는 목 놓아 우셨다. 그동안 잘 해주지 못해 미안했었다고, 먼저 가 있으면 곧 따라 가겠다고…….

맨손으로 땅을 긁으시며, 왜 이렇게 야속하게 훌쩍 가 버렸냐고 하염없이 가슴만 뜯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어른도 우시는구나, 아버지도 눈물이 있으셨구나…….
  
그 해 봄부터 아버지의 건강도 좋지 않으셔서 농사일은 머슴들과 내가 짓게 되었다. 쉽게만 보였던 작은 일 하나하나가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큰일들이었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지만 실수투성이였다.

아버지는 일을 하지 않으시고 쉬시면서 오히려 건강이 더 나빠지셨다. 기침을 한 번 하시기 시작하면 옆에서 보는 내가 마음이 아플 정도로 힘을 소비하시고서야 멈추시곤 했다. 아버지, 나 그리고 동생과 같이 식사를 하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대화의 기회도 많아졌다.

어쩌다 ‘간고등어’라도 생기면 살을 발라 아버지 밥숟가락에 올려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시면서 우리 아들 효자라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시곤 하셨었다. 아버지를 가까이서 자주 뵈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10형제를 키워내시던 왕초 아버지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늘을 쳐다보시며 멍하니 계실 때도 많아지고, 긴 겨울밤에 돌아누워 잠드신 어깨가 작게만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하루를 멀다하고 나와 동생에게 내리시던 불호령도 언젠가부터 줄어들었다. 어머니가 안 계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너무 작게 보였다. 잔소리 할 곳도, 스트레스를 풀어놓을 곳도 없으셔서 그저 하늘만 보시는 시간이 많아지셨다.

그렇게 3년을 더 농사를 짓고, 내가 고등학교를 대도시로 유학 떠나게 되는 바람에 농장을 정리하고 우리 식구들은 읍내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1년이 더 지날 때쯤의 어느 날 급한 연락을 받고 온 가족이 모였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어머니 옆에 합장을 해 드렸다. 돌아오면서 많이 울었다. 어머니를 모실 때는 울지 않았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그냥 줄줄 흘러내렸다. 살아 계실 때 더 잘 해 드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떠나보내고 후회를 하는 건지…….

자꾸만 가슴이 아파온다. 아버지는 어머니 곁으로 곧 가시겠다던 소원을 이루셨을까? 토닥토닥 다투시던 대로 하늘에서도 다투시고 계실까?

나는 지금 일본에 살고 있다. 고향땅에 묻혀있는 아버지를 뵈러 자주는 못 간다. 하지만 1년에 한 두 번은 성묘를 간다. 살다보니 어느 덧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나이를 훌쩍 넘겨 내가 살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저도 곧 가서 이 땅에서 못 해 드린 효도 백배 천배로 해 드릴게요.’
‘아버지! 그 때 엄마랑 살겠다고 말했던 거 미안해요. 그 땐 어려서 잘 몰랐었어요.’
‘어머니, 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십남매를 이렇게 공부시켜주시고, 키워주셔서…….’

‘아버지,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좀만 더 살다가 어머니, 아버지 모시러 갈게요….’
‘금년 추석에는 벌초도 성묘도 못 갈 것 같네요. 내년에는 꼭 갈게요.’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