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우 수필] 비밀의 방 ①

이훈우 2020-04-13 (월) 13:17 4년전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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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훈우/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 본부장

 

아침부터 찌푸리던 하늘이 기어이 비를 뿌린다. 이런 날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 한 구석에 비밀의 방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간다. 자신의 방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믿고 주장하면서.

 

내게도 누구 못지않게 큰 비밀의 방이 있다. 가슴 졸이며 키웠던 청포도 같은 첫사랑의 방이다. 난 어린 시절 20(8킬로미터)나 떨어진 읍내 중학교를 걸어서 다니던 시골뜨기였다. 한 학년에 260명이나 되는 남녀 공학의 제법 큰 공립중학교에서 나의 첫사랑은 시작되었었다. 혹시나 오늘은 그 아이와 같이 걸어갈 수 있을까? 아니면 잠시만이라도 얼굴을 볼 수 있을까? 매일 매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를 오고가던 가슴떨림이 있었다. 어쩌다 학교에서 그 아이가 체육이라도 하는 날이면 나는 교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 아이의 모습만 바라보곤 했었다. 그 아이에게는 늘 빛이 났었다. 보고 있으면 세상 모두가 아름답게 보이고 그 아이 주변이 천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아이와 나는 동급생으로 미술부 활동을 같이 했다. 취미가 같아서가 아니라 난 오로지 그 아이를 보기 위해 미술부에 들어갔다. 수업을 마치고 그 아이와 학교 이곳저곳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던 시간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세상이 모두 내 것이었다. 그 아이는 그림으로 꽤 유명했었고 실력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지 모른다. 시골 촌뜨기가 전국 미술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을 정도였었으니까.

 

나는 당시 공부도 잘 하는 모범생이었고, 싸움 실력도 있었고, 운동도 꽤 잘 했었다. 주변 많은 여학생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던 소위 이었다. 그러나 나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그 아이에게로만 향해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것도,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는 것도 오로지 그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한 나의 작은 몸부림이었을 뿐이었다. 당시 나는 늘 남보다 노력했었고, 언제나 한 발 앞에 서 있었었다. 공부든 뭐든 나보다 더 잘 하는 학생이 나타나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아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1등을 해야만 했다. 나의 인생 모든 것은 오로지 그 아이의 것이었다. 그 아이는 나의 전부였고, 마음속에 알알이 여물어 가고 있는 청포도였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나에게서 떠나 버렸다. 대학 가서 만나자는 쪽지 한 장 남긴 체. 하늘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그 때 첨으로 알았다. 앞이 깜깜해지고, 먹는 밥알이 모래알이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그 아이만 어른거렸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에서야, 그 아이의 아버지는 마을의 유지였고, 이권 사업에 연류 된 것이 알려져 급하게 마을을 뜰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학기만을 남겨 놓은 나의 중학 시절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학교도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부터 언제나 나와 학교생활을 같이 했던 나의 해바라기 단짝 친구의 조언과 보살핌으로 며칠 후부터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그 아이가 이사 갔을 것으로 예상되는 도시로 유학을 결심했다. 오로지 그 아이와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10형제 중 9번째로 태어난 우리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0명이나 되는 형제들을 모두 대도시로 유학보내기에는 시골살림으로는 버거운 형편이었다. 그래도 난 뜻을 굽히지 않고 유학의 길을 택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대도시에서 유학을 시작한 때부터 나의 고생은 시작되었다. 사글세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고, 생활비며 책값도 벌어야 했다. 학생이 사는 것이 힘들어 공부는 오히려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지원도 없는 고등학생 유학생활이었지만 그래도 내 얼굴에는 늘 웃음이 있었고, 날마다 힘이 솟았고 꿈과 용기가 있었다. 밤마다 꿈속에서 그 아이가 내게로 와 응원을 해 주고 있었으니까. 3년간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렇게 정신없이 투쟁 같은 삶 속에서 후딱 지나갔다. 1970년대 말 당시는 민주화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도 일반인도 고등학생들도 모두 데모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그렇지만, 내 삶이 더 바빴고,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했기에 데모대에 참가할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서울의 일류대학에도 충분히 입학할 수 있는 예비고사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 지방의 교육대학을 지원했다. 수석입학이라는 영예와 함께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닌 덕분에 생활고는 조금 덜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조금의 여유가 생기게 되면서 그 아이를 직접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작게만 느껴졌던 도시가 어떻게 그렇게 넓기만 한지. 결국 졸업 때까지도 만나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대 초에 공무원 발령을 받았다. 그 뒤에도 그 아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지만 내 마음속에 늘 함께였다.

 

그렇게 전쟁 같던 시간들이 흘러 나도 성인이 되었고, 직장 생활에 몇 년을 시달리던 어느 날, 상담을 요청받고 직장 주변 찻집을 찾았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기쁨이었다. 놀람 그 자체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 아이가 거기 서 있는 것이다! 빛이었다. 꽃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온몸이 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주변이 눈에 들어올 때쯤에는 둘이가 서로 울고 있었다. 10 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기쁨도 잠시, 너무 먼 길을 돌아와 버렸다는 느낌에 서로가 할 말도 못하고 가슴만 쥐어뜯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있다가 헤어졌다. 그 뒤 몇 번의 연락은 더 있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무엇이 그리도 무서웠는지, 무슨 벽이 그렇게도 높게 느꼈었던지. 서로가 마음을 확인도 못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아이도 키우며 살고 있는 지금, 한 번은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아직도 소식이 닫지 않는다. 지금도 한 번씩 가슴 한 쪽이 텅 빈 느낌은 그 아이의 자리일까? 이제는 살아야 할 날보다 살아 온 날이 더 많겠지만 우연이라도 한 번 마주쳐주었으면.

 

오늘도 그 때처럼 비가 온다. 이런 날이면, 소쩍새 울음소리 자장가 삼던 고향의 작은 마을, 파란 하늘, 장마에 한껏 물오른 식물들이며 그 내음까지 가슴으로 몰려온다. 고향마을에도 아침부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겠지. 소쩍새도 여전할까.

이런 날이면 잊고 있던 그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이훈우의 어린 시절 이야기-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