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읽는다] 열하일기/ 박지원

김기원 2018-11-12 (월) 06:53 5년전 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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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 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사람들은 다만 칠정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모르지.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지.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저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사람의 감정이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다 보니 교묘하게 칠정을 늘어놓고는 슬픔에다 울음을 짝지은 것일 뿐이야.

-열하일기 P138에서 읽은 명문장이다-


<김기원/ 공군방공포병학교 학교장, 공군대령>

<열하일기>는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중국 기행문집이다. 그 당시 실력자 홍국영과의 불화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사, 독서에 전념했다.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이 진하사 겸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6월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돌아와서 몇 년의 작업 끝에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했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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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저자소개


박지원의 호는 연암(燕巖)이다. 조선후기 비판적 신지식인이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대대로 서울에서 살던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박지원이었지만, 당대에는 별로 여유로운 삶은 살지 못했다. 한때 생원진사시에서 장원을 하며 촉망받던 재원이었던 박지원은 끝내 과거를 포기하고 1771년(영조 47) 황해도 금천의 골짜기인 연암골을 찾아들었다. 박지원의 호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의 삶은 선조들의 청렴한 삶과 유람을 즐기는 그의 생활관에서 연유했다.

박지원이 20~30대에 <양반전>이나 <예덕선생전>과 같은 세태를 비판하는 작품을 집필하게 된 것은 처숙(妻叔) 이군문(李君文)에게 수학하고, 학문 전반을 연구하다가 30세부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사귀고 서양의 신학문에 접한 인연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탑골을 무대로 활동하던 이서구나 이덕무, 유득공 등을 만나 교류한 것이 기쁨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1786년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이 되고 1789년 사복시주부, 이듬해 의금부도사, 1791년(정조 15)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을 역임한 뒤 사퇴했다. 1797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고 1800년(순조 즉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 홍대용·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파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도 발표했다.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덕무(李德懋)·박제가·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저서에 <연암집>이 있다.

<연암집> ‘북학의서’에는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중략)…

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라고 적혀있다.

그 외에도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다.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