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순 칼럼] 스스로 빠르게 결단하자

정홍순 2019-01-22 (화) 08:05 5년전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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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순/ 시인, 한세연 순천부본부장> 

정초가 되면 조용히 알 만한 사람 몇을 불러 한 해의 건강과 글쓰기에 관하여 조언해주는 문단의 선배가 있다. 하지만 연락 놓을 수 없이 서울 어디 입원했다는 소식만 있을 뿐 1월도 중순이 다가고 있다. 그저 하루속히 쾌차하기만을 속절없이 비는 마음뿐이다.

늘 빨간 펜을 들고 어색한 구절이나 맞춤법에 어긋난 단어들을 꼼꼼히 발라 읽어주는가 하면, 후배들에게 읽어야 할 책이 있으면 꼭 선물하고, 아니면 복사해서라도 챙겨 주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선배다. 작년에는 명언 모음 30편을 손수 작성해서 한 장씩 선물로 주었다.

지금도 책상 곁에 붙여놓고 숙지하고 있는 가운데 선배를 생각하며 “사람이 학문을 배우는 것은 말을 잘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실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이다.”는 명언이 눈에 들어오는 아침이다.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흔하다 할 수 있어도 아랫사람을 살뜰히 챙기는 선배가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하니 선배가 더욱 생각이 난다.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 심한 상처를 스스럼없이 가하는 못된 선배들이 얼마나 많은 현실인가 말이다. 입만 가지고 즐길 것 다 즐기고, 갈 곳 다가며 쾌락의 날들을 뽐내는 귀신같은 인간들이 ‘미투’에 나자빠지고, ‘그루밍’에 걸려 넘어지는 한심한 모습들이 줄을 서고 있는 현실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고 나 몰라라 돌아서는 예의 없는 후배들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자업자득일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들은 왜 손해 보는 일을 하지 못할까. 자신이 그렇게도 약하단 말인가. 모두가 남보다 내가 낫다는, 잘나 보이는 데만 주력할 뿐 배려라는 최소한의 양심도 없이 살아가는 무정(無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이란 말에 대하여 셰익스피어는 그의 마지막 작품 ‘태풍’에서 “기도에 의해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 몸의 마지막은 절망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옥좌에도 상달하고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켜준다. 당신들도 용서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情)으로 이 몸을 놓아주시오.”라 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 이성복 시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논어 현문 편에 있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들어 쓴 글이었다. 위기지학은 위인지학이란 말과 함께 가르치고 있는 바, 공부하는 사람 중에는 자기가 설정한 목표를 향해 공부하는 사람(위기지학)도 있고, 남의 눈이나 평가에 신경을 쓰면서 공부하는 사람(위인지학)도 있다.

이성복은 “글쓰기에서 바른 길은 자기고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거다. 글을 쓰려면 내가 먼저 아파야 한다. 그래야 남을 아프게 할 수 있다. 결국 자기를 위한 공부(위기지학)을 해야 한다.”고 ‘위기지학의 시’를 논한 바 있다. 정이 닮긴 글이나 삶이 철저한 자기 응시 없는 물렁한데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고 있다.

필자가 다닌 고등학교 교훈에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쉬지 말라는 노력의 사자성어이다. 이는 ‘역경을 극복하는 수행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공부에 정진하라는 교훈으로써 ‘스스로 강한 사람은 쉬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자기성찰에서 완전한 글쓰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글쓰기만한 남을 위한 봉사와 헌신이 어디 있겠는가. 나 혼자 자화자찬하는 글이라면 남을 위한 글이 되지 못할 터 차라리 내놓지 말고, 없는 듯해야 더 옳을 것이다. 시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다. 누가 강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함이 담겨있는 시나 글이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쯤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최근 선배들의 대화 속에서 느끼는 것이 있다. 단연 ‘정을 나누며 살자’는 이야기는 들을수록 명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하면 ‘즐거운 인생’ 또한 자주 듣는 말이다. 열심히 일한 만큼 인생의 여유를 잃어버리지 말자는 이야기 속에서 단 한 번의 인생에 돈이 다가 아니라는 행복론이 끊이지 않았다.

행복한 노년은 무엇인가. ‘노병은 죽지 않았다.’와 같이 노년들의 대작들이 고전되고 있는 것을 보자. 톨스토이가 72세 때 쓴 ‘부활’은 그의 사상, 종교, 예술 전반에 걸쳐 말한 것으로 ‘예술적 성서’라 일컬어지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89세의 나이로 로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론다니니 피에타’를 미완으로 남긴 채 생을 마감하기까지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선배가 준 명언 중에 “나 자신과 싸우는 것이 가장 힘든 싸움이며 나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이 가장 값진 승리이다.”는 말에 밑줄을 긋는다. 노년을 백발의 영화라 하였다. 흰 머리가 공경의 대상이 아니고 인생의 경험과 지혜가 공경의 대상이듯이 끝까지 잘 지켜 후배들의 아름다운 표상이 되길 필자 자신도 다짐해본다.

회사에는 사훈이 있고, 학교에는 교훈이 있듯이 가정에는 가훈이 있다. 유대인들이 집을 드나들며 문설주에 있는 말씀을 주시하듯, 새기고 지켜야 할 문장들이 마음 판에 하나쯤 있었으면 싶다. 이제 선배를 생각하며 ‘속단론’을 새기고 싶다. 이는 ‘스스로 빠르게 결단하자’는 뜻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