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순 칼럼] 아름다운 화해

정홍순 2018-11-27 (화) 10:13 5년전 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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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순/ 시인,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순천부본부장>
 


벌써 새 달력을 받았다. 초침이 가면 분침과 시침도 함께 간다고 한 말의 의미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교회력에 따라 12월부터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강림절이 4주 동안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한 달은 새로운 시작이며 또한 마지막 달이다.

새 달력을 걸며 언제나 그랬듯이 다짐도 함께 걸곤 하지만 결과는 늘 뜯겨나간 달력처럼 세월만 낭비했다는 자책이 더 많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탐식한 ‘나는 쭉정이올시다’라고 탄식하며 주저앉고 만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왜 가상한 일이 없겠는가. 나라와 나라, 이웃과 이웃, 우리들이 살아온 한 해 동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은 ‘화해’하는 일이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두 형제가 싸우듯이 수 없이 다투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화해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일이며 공존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이념의 사슬에 매여 남북으로 갈라져 살아온 한반도에 평화를 모색하는 화해야말로 가장 선한 일이었다. 아직도 치유해야 할, 극복하고 넘어야 할 역사의 아픔들이 남아있지만 우리들은 슬기롭게 잘 극복할 수 있는 정신이 깃든 민족이다. 화해가 멀면 멀수록 싸움은 끝나지 않고, 화해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람의 정은 나는 것이다.

무조건 용납하는 신의 행동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 수 있는 수평의 선이 잘 놓아질 때 아름다운 그림이 탄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화해의 기술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노래 가사에도 있듯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face to face)는 것이 아니겠는가. 최근 ‘이수역 폭행사건’을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번 사건은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이 상처와 소외감을 분노와 폭력으로 표출한 사건이다.

모두 다 이렇게 말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화합하는 데 힘쓰라’고 말이다. 그러나 원론적인 말이 무엇인지 우리는 스스로가 잘 안다. 이처럼 메시지나 던지는 시대를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얼굴 없는 언어시대를 살고 있다. 영상미디어 시대를 환호하던 우리가 결국 극복해야 할 문제에 직면한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얼굴 없는 인격의 말들이 멀쩡한 사람을 죽이고, 열등의 자리로 몰아내고, 까발리고, 매장하고, 몰아가고, 당선시키고, 낙선시키고, 살인행위를 일삼는 비인간행동이 너무 큰 사회 망을 구축하였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화해의 기술을 가르치고 배워야한다. 여기에 화해를 위한 준비가 필요치 않겠는가. 구약에 나오는 야곱을 보면 그는 쌍둥이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하여 준비한 것이 있다. 각종 예물 보따리를 앞세웠지만 가장 염려스러웠던 것은 형의 얼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었다.

밤새 천사와 씨름하며 영적 준비를 한 야곱은 환도가 위골되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이제 속이는 자(야곱)가 아니라 열두지파의 조상인 이스라엘(야훼여 도와주소서)로 거듭난 것이다. 화해하는 두 형제의 극적인 만남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지금도 읽히고 가르쳐지는 율법으로써의 경전인 것이다. 성숙한 사람이 먼저 손을 내민다고 했다. 화해는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이다.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다음 문장을 시작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세상에는 많은 직분이 있다. 봉사와 섬김의 직분 등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직분 중에 최고의 직분은 ‘화해의 직분’이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와서 행한 일 가운데 신과 인간의 막혔던 담을 헐어버린 일이 화해의 직분이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평화가 이루어지길 온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섬긴 사랑이었다.

툭하면 칼부림 나는 세상에서 필자는 솔포기 같이 연애하며 살다간 부모님이 생각나곤 한다. 어머니는 만성주부습진으로 고생하시다 가셨다. 아궁이 앞에서 솔잎으로 습진을 따내던 모습이 선하다. 아버지는 땔감을 손질해주며 통마늘에 술 한 잔 하는 것으로 화해가 진척되었고, 어머니 눈물은 금세 밥솥이 끓는 것으로 마무리 되곤 하였다.

홧김에 배운 담배가 골초가 되었지만 그래도 담배만은 아버지 앞에서 당당했던 어머니였다. 아옹다옹하면서도 백수를 누리고 가신 비결에는 늘 화해가 있었던 것이다. 화해는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화해는 쓴 뿌리를 제거하는 치유요, 약이다. 화해는 더욱 정(情)들게 하는 건강의 비결이다.

이제 연말모임이 크고 작게 있을 것이다. 어디서나 잔을 들고 건배하듯이 마음과 마음을 부딪치며 화해의 잔을 높이 들자. 전 국민이 화해의 잔을 들어 제례의식에서 관제(灌祭)로 붓던 일같이 부을 수 있는 올해를, 그냥 보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