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 칼럼] 낙안신전마을의 손가락 총

관리자 2020-08-19 (수) 13:49 3년전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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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참살이뉴스 대표

 

여순사건당시, 손가락 총은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선량한 양민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손가락 총에 쓰러져 갔다. 특히 마을사람들 전체가 학살당하고 시신까지 알아볼 수 없도록 불살라졌었던 역사의 현장을 더듬어 볼까 한다.

 

전남 순천시 낙안면 신전마을 당산나무는 지금도 그날의 악몽을 간직한 채,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주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마냥 묵묵히 버티고 서있는 당산나무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날의 악몽을 되새김질한 이웃주민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현재는 폐교가 되어 사유지가 됐지만 당시의 낙안북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은 벌써 백발이 되어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실 이 노인들은 당시의 상황을 조금 조금씩 보고 듣고 구전으로 전해주는 산증인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았다. 이들은 당시의 신전마을현장을 말이나 글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아수라장도 그런 아수라장이 없었고, 참혹한 광경이었다고 전한다. 게다가 당시의 현장을 뒤늦게 보고 느꼈던 어린마음에는 무서움과 공포만이 도사렸으며, 두 번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다고 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하는 신전마을 ㅇㅇㅇ씨는 전한다. 그는 낙안면의 대표적인 집단학살 장소는 문홍주의 손가락 총에 학살된 신전마을이다고 했다.

 

잠시, 손가락 총에 얽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쌍암면 남정출신인 문홍주는 14세의 나이로 빨치산원이 돼 총상을 입은 후, 신전마을에 왔다. 그는 빨치산과 함께 마을사람들에게 협박조로 치료를 요구했으며, 마을사람들은 치료를 해 주었다. 그는 치료 후, 승주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조부에게 가던 중 다른 마을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그는 "우리 유를 데리고 가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자 이것을 듣고 있던 면서기 서정수라는 사람은 문홍주의 행동을 이상히 여겨 경찰에 고발, 현장에서 체포됐다.

 

문홍주가 취조를 받은 후, 1949108일 밤 12시경 토벌대가 신전마을에 들어왔다. 주민들을 전부 모이게 한 후, 이장 위홍량에게 '빨갱이 활동을 한 사실을 실토하라' 하였으나 거부했다. 그 때, 토벌군은 문홍주를 데려와 손가락으로 가르치게 했다. “문홍주를 치료해 주거나 옷 세탁, 약제공, 올벼쌀, 누룽지, 홍시 감을 준 사람들에게 빨치산 혐의자라는 혐의를 씌웠다. 문홍주가 손가락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손가락 총은 지금도 무서운 무기가 아닐 수 없다.

 

토벌군은 3살 아기에서부터 60세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22명을 마을 중앙에 있는 집에 끌어와 총살을 했다. 시신에다 기름을 끼얹어 불태웠다. 시신은 생존한 신전마을 사람들과 이의조라는 어르신이 함께 처리하였고, 치아나 반지, 시계 등의 특징 있는 물건으로 죽은 사람을 구분했다. 신전마을의 학살사건은 여순사건기간 중 이 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비참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한 달 전이었다. 낙안출신인 김근철씨는 지난 해, 순천시장과의 대화시간을 상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여순사건당시, 마을주민전체가 진압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만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면서, 이곳 폐교를 매입해 여순사건 치유의 숲을 조성해 달라고 건의한바 있다고 했다.

 

건의에 따른 허 시장은 폐교부지가 민간인에게 매매되었다면 곤란하지만 그 폐교부지 주인이 매매의사가 있다면 순천시가 그 부지를 매입해 여순사건 치유의 숲을 조성하겠다고 말한바 있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어제 그 폐교부지의 주인을 만나서 이야기한 결과 매매의사를 밝혀왔다.”며 여순사건 치유의 숲 조성은 이뤄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순천시의 추경예산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동분서주했었다. 더욱이 그는 오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별의별 방안을 모색했었다. 그 결과 주암호를 관리하는 수자원공사가 수계지역사업으로 내놓은 29억 원의 예산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따라서 시가 사업계획서만 제출하면 부지매입비는 물론 건립예산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는 대안을 내 놓았다.

 

아마도 허 시장은 시민과의 대화에서 낙안주민들에게 약속한 공약을 이행할 것으로 보인다. 억울하게 희생된 여순사건 피해자와 그 유족을 위해서라도 여순사건 치유의 숲은 필히 조성돼야 할 것이다.

 

지금도 여수와 순천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는 오명과 함께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고스라니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뀐 현실에서 여순사건도 가르마를 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때, 여순사건의 신전마을피해현장에 필요한 시설은 무엇일까? 손가락 총을 대신 할 수 있는 역사적인사업은 무엇일까? 순천시장의 고민과 고민은 깊어만 갈 것이다. 필자역시도 술술 나오고 있는 여순사건 치유의 숲조성사업은 바람직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다. 그것은 당시의 신전마을집단학살사건을 지역민으로부터 전해 들어 조금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신전마을 경계지점인 평사리 용쟁이골 움막에서 글을 쓰고 있기에 이곳 사건현장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비 오고 바람 불어오는 날이면 그들의 넋이 당산나무를 배회하는 듯 처절함이 묻어나고 있다.

 

지금도 여순반란사건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참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이 사건은 여수와 순천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여수에 주둔한 14연대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사건이다. 다시 말해 19481019,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의 14연대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켜, 한때 여수와 순천 일대를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여수, 순천 1019 사건(이하 여순사건)’이다.아무튼 당시의 손가락 총과 지금의 손가락 총은 무시무시한 무기가 아닐 수 없다.

 

낙안신전마을의 집단학살사건도 손가락 총에 의한 떼죽음이었다. 역사적인사건과 피해유족을 위해서라도 낙안북초등학교폐교부지의 치유 숲은 조성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