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우 수필] 비밀의 방, 나의 인생, 나의 한글⑩

이훈우 2020-06-16 (화) 06:37 3년전 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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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우/ 일본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본부장

아침부터 찌푸리던 하늘이 비를 뿌립니다. 이런 날이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난 중학교 시절 8킬로미터나 걸어서 읍내 중학교를 다니던 시골뜨기였습니다. 한 학년에 260명이나 되는 남녀 공학의 제법 큰 공립중학교에서 나의 첫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아이와 나는 동급생으로 방과 후에 그리기 활동을 같이 했습니다. 취미가 같아서가 아니라 그 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아서 그리기부에 들어갔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그 아이와 교정의 이곳저곳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그림을 그리던 시간들은 나에게 있어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나는 당시 글도 잘 쓰고 공부도 잘 하는 모범생이었고 싸움 실력도 제법 있었으며 운동도 꽤나 잘 했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여학생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던 소위 말하는 요즈음의 ‘짱’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시선은 오로지 그 아이에게로만 향해있었습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것도 글을 열심히 쓰는 것도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는 것도 오로지 그 아이에게 좋은 인상으로 남기 위한 나의 작은 몸부림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그 아이는 나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어른이 되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쪽지 한 장 남기고 말입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느낌을 그 때 첨으로 알았습니다.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느낌도 그 때 처음 느꼈고 입안으로 떠 넣는 밥알이 모래알 같다는 말도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그 아이만 보였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인지 모른 열병을 앓고 나서야 읍내 병원에서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한 학기를 남겨 놓은 나의 중학교 시절은 지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학교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공부도 운동도 그림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부터 언제나 학교생활을 같이 하며 나만 바라보던 나의 해바라기 단짝 친구의 조언과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며칠 후부터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학을 무사히 마치고 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 아이의 흔적을 많이도 찾았지만 만날 수는 없었고 일본으로 갔다는 정보만 얻게 되었습니다. 그 날부터 난 어떻게든 일본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혹시라도 우연히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일본의 오키나와부터 홋카이도까지 연휴나 방학만 되면 장기 여행을 했습니다.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말입니다.

세월은 흘러 이번 생에서는 인연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 쯤 나는 다니던 학교에 휴직을 신청하고 일본으로 가는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토요일에는 토요학교(한글학교)에서 재일동포 아이들에게 한글과 우리 역사를 가르쳤고 밤에는 민단에서 운영하는 민족대학(코리안 아카데미)에서 재일동포 성인들에게 한글과 우리 역사 그리고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사실 일본으로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만류를 했습니다. 좋은 직장 버려두고 친척도 친구도 없는 외국에 가서 뭔 고생을 사서 하려고 그러느냐며 많이들 말렸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살다보면 혹시라도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굳이 일본행을 택하고 1999년 4월 도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생각보다 일본 생활이라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내가 한 달 내내 열심히 모으면 17만 엔 정도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는데 집값(월세)가 한 달에 13만 엔이었습니다. 그 외 각종 세금 및 공과금으로 3만 엔 정도가 지출되면 달랑 1만 엔이 남을 뿐이었습니다. 교통비와 생활비로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내가 벌인 일이었기에 묵묵히 참고 열심히 견뎠습니다. 나의 정성이 그 아이에게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투쟁 같은 삶 속에서 1년이라는 세월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2000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로 들떠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한국의 국력이 올라가고 해외여행 자율화 바람으로 일본으로도 많은 한국인들이 몰려들어 동경의 신주쿠 쇼쿠안도리에는 한국인거리가 형성될 정도였습니다.

한국인 가게와 간판들이 들어서고 거리에는 한국가요들이 흘러나왔으며 김치, 감자탕, 지지미 등의 한국 요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때쯤 지인이 재일교포 자녀에게 한글을 가르쳐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너무나 좁은 외국인지라 선뜻 결정을 하고 중학교 1학년 재일교포 4세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독어를 제2외국어로 배웠었는데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쳤습니다.

당시는 많이도 불평했었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행운이 되었습니다. 세상일이란 참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은 못하지만 일어를 읽고 쓸 정도는 되니까 금방 익힐 수가 있어 그 아이는 나에게 일어를 나는 그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서로가 배우고 익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글을 가르치면서 왜 이 아이는 한국인이면서 한글을 모를까에 대해 의문에 생겼습니다. 알고 보니 재일동포 2, 3세들은 나름 데로 피해를 많이 당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학교에서는 한국인이라고 선뜻 말도 못하고 이지메(왕따)가 무서워 일본 이름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행여 발각이 될까 노심초사 학교를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 방학이나 휴가에 맞춰 한국에 가서 한글을 배울 수도 있었겠지만 1988년 올림픽 이전에는 그것이 쉽지가 않았고 특히 재일동포들은 입국심사가 까다로워 한국으로의 입국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사건 이후 재일동포들의 한국 입국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여서 한글을 배울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던 시기의 세대들이 지금 일본에서 주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일동포 2, 3세대라고 합니다.

일본의 한국 때리기도 극에 달하여 행여 한국인이라고 밝혀지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차별 속에서 국적을 속이고 모국어를 사용하지도 못하면서 살아가야하는 처지였다고 합니다. 오로지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일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고 합니다. 재일동포 중에는 마루한, 소프트뱅크, 조조엔, 돈키호테, 빅쿠카메라, 안라쿠텐 등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전국 지점을 거느린 대기업의 대표도 많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상당히 유명한 연예인 및 재력가들도 많다고 합니다. 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 개최를 거치면서 급작스럽게 대한민국의 위상은 높아지게 되었고,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도 서서히 자기 이름을 쓰면서 당당하게 한국인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내가 가르치던 토요학교(한글학교)에서도 12월이면 민단을 통해 재일동포들의 주소를 확보하여 가정 방문을 하면서 모집활동을 했었습니다. 물어물어 찾아가서 학교에 보내달라고 권유를 하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화를 내면서 쫓아내다시피 대문 밖으로 밀어내곤 했었습니다. 지금까지 가슴 졸이며 숨어 살고 있는데 한국학교에 보내면 한국인임이 들통 나서 동네에서도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된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추운 겨울에 얼음물 사례를 받기도 하면서 모집활동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서두에서 내가 왜 17만 엔의 수입밖에 안 되면서 13만 엔이나 하는 집을 얻을 수밖에 없었느냐면 동경은 집값 자체가 비싸기도 하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아예 집을 빌려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실은 지금도 일본에는 한국인에게 집을 빌려주지 않는 곳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일본인 보증인을 세우라고 하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에게 빌려주는 방을 찾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일본인 대신에 학교가 보증을 서면 인정해준다고도 하고 한국인에게도 방을 빌려준다고 하여 거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을 얻을 때는 부동산을 통해 얻지만 그 절차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방을 얻으려면 일단 관련 서류를 제출받아 여러 가지를 살피는 1차 심사를 받게 됩니다. 신청 후 2주일 정도 지나 입주 허가가 떨어지면 한 달 치 방값을 선불로 내야하고, 두 달 치 방값을 보증금 형식으로 맡겨야 합니다. 나갈 때 내어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청소비, 방 수리비 등의 명목으로 떼어버리고 반 정도 받아 나오면 잘 받아 나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부동산 소개 사례비로 한 달 치, 집주인에게 예의비조로 두 달 치 이렇게 총 집값의 6달치를 한꺼번에 내야하고 이사 경비까지 포함하면 7달치 정도의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히코시 빈보(이사로 인한 빈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요즘은 동경의 경우 올림픽 때문에 많은 집들이 지어져서 예의비도 없거나 한 달 치, 보증금도 한 달 치 정도로 받는 경우도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나면 다시 안전보험, 갱신비(보통 방값의 한 두 달 치)를 다시 지불해야 합니다. 참으로 살아가기에 빡센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거기에 교통비는 택시 기본료가 7,000원 정도, 전철 및 시내버스 기본료가 2,000원 정도이고 달린 거리와 시간에 따라 살인적으로 요금이 빨리 올라갑니다. 그래서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30분 정도의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웬만하면 걸어서 다니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빈틈없이 물려서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이고 옛날과 최첨단이 공존하면서 돈 많은 사람은 돈 많은 대로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는 대로 각자 눈치를 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 사회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20년 정도 살고 있지만 아직도 일본 사회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요? 분명한 것은 보기에는 자유가 철철 넘치는 것 같은데, 들여다보면 국가에 의에 언론이 100% 통제가 가능하고 국민들이 생활이 경찰의 감시 하에 놓여있는 경찰국가나 심각한 사회구의 국가라는 인식은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말해보면 일본은 축제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1년 내내 전국에서 각양각생의 축제들이 이어집니다.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개최되는 축제, 신사(진자)를 중심으로 개최되는 축제, 그 외 각종 단체에서 개최되는 축제들이 1년에 걸쳐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해 끊임없이 개최됩니다. 여느 나라의 축제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축제도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크고 작은 전국의 각 지역에서 특색을 살려 빠짐없이 개최된다는 점과 처음의 원형이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축제일에는 주변 도로는 물론이고 상점가 주민들 모두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양보하면서 축제를 돕고 함께 어울리는 모습 또한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한 달에 두 번씩의 국가적 규모의 명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추석, 단오, 설날 정도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그 나마 그 모습이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느껴집니다. 변화도 좋고 발전도 좋지만 옛 것을 유지하고 더욱 가꾸어나가는 것 또한 변화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보는데 과연 일본은 어떻게 그 많은 축제들이 지금도 원형대로 잘 이어지고 있을까요? 이 또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의 경우 축제에 반드시 어린이들을 참여시킨다는 점입니다. 마을의 상징물(신물)을 들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힘겨운 축제의 경우에도 그 속에는 반드시 어린이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너무 커서 위험하면 작은 모형을 만들어 따로 들고 축제에 참여합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어린이들도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축제를 즐기고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전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힘이 아닌가 생각 해 보았습니다.

내가 가르치게 된 중1 학생은 일본의 꽤 유명한 사립중학교에 다니는데 1년 수업료만 2,000만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일본은 전국에 300여 개의 유명 대학들이 보육원부터 시작하여 대학교까지 운영을 하고 있는데 많은 비율의 학생들이 보육원에 입학하면 대학까지 그대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와세다, 케이요 등의 유명 사립대학도 보육원부터 대학까지 일관하여 진학하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놀랐습니다.

일본의 경우 약 30% 정도의 학생들이 사립학교에 다니고 나머지는 공립학교에 다니는데 공부를 하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사립보육원부터 시작하여 사립 상급학교로 에스컬레이트식 진학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중간에서 걸러지지 않으려고 무지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서울의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노력하는 우리나라 학생들 못지않게 사립학교 학생들은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70%의 학생들은 보통의 국민 교육 차원의 교육만 받습니다. 공부보다는 인성, 질서 등 일본 국민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익히고 배우는데 더욱 치중을 합니다.

학교에서도 아주 얇은 교과서로 1년을 배우는데 될 때까지 반복을 시키는 것 또한 우리와 다른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철봉 거꾸로 오르기가 교육내용에 나오면 학급의 학생 100%가 완벽하게 해 낼 때까지 반복을 되풀이 합니다. 그래서 교과서 자체가 아주 얇게 되어 있는데 아주 기본적인 내용만 있습니다. 공립학교에서는 학교장 상장이 없습니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내 문화제를 개최하더라고 잘 하는 학생들이 출연하는 것이 아니고 학급 학생 100%가 함께 출연을 합니다. 운동회 때 격한 기마전을 하면서도 남자 여자를 구분하지 않고 덩치에 따라 같이 기마를 만들고 어깨싸움을 하면서 같이 경기를 합니다. 어떤 학교는  달리기도 남녀로 갈라서 달리지 않고 그냥 키순으로 섞어서 달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보면 일본의 여자학생들이 한국의 여자학생들보다 훨씬 생활력이 강하고 운동도 잘 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본의 경우 대학 진학률이 50%가 안 된다는 사실 또한 놀랍습니다. 물론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질 높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대학 진학이 더 좋은 삶과 더 좋은 인생을 보장해 주는 시스템이라면 일본인들 대학을 안 가겠습니까? 그런데 일본의 시스템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본인이 노력하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 같습니다. 90% 이상이 대학을 진학하고 모두가 성공을 위해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대학, 대학원까지 끝가지 경쟁해보자고 머리를 싸매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르치는 중1 학생은 한글을 배우지 않아도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한글을 배우고 익힐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물어보았더니 요즘은 일본에서도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고 이것저것 물어오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대답을 해 줄 수가 없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글을 배우고, K-POP을 익히고, 한국의 연예인을 알아간다고 했습니다. 목표가 뚜렷한 학생에게 가르치기는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한국의 노래와 연예인들 그리고 한국의 놀이와 음식을 체험하면서 그 친구와 가까워지고 이해의 폭도 넓혀갔으며 거기에 비례하여 나의 일본 생활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일동포 사회에서 한글과 한국 역사 지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가를 깨닫게 되어 그 분야에서 뭔가 내 역량을 발휘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우선은 여름방학에 여름한글캠프를 개설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두 차례에 걸쳐 탈북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여름한글캠프를 운영하여 재일동포재단으로부터 우수 모범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겨울방학에는 전국의 한글학교(토요학교) 학생들을 모아 5박 6일 동안 청소년수련원에서 한글캠프를 운영하고 그 우수자들 100명을 선정하여 한국의 인천교육대학에 위탁하여 11박 12일의 모국한글캠프를 기획하여 재일동포 및 자녀들에게 한글의 소중함과 민족정신의 중요성을 심어주었습니다.

1997년에는 재일본한글학교협의회를 발족하여 총회장으로서 활동하면서 전국 200여 개의 한글학교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일본과 인연을 맺고 한글지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잊을 수 없는 중학교 때 그 아이 덕분인 것 같습니다. 그 아이를 찾으러 일본으로 오게 되었고 일본에서 한글을 가르치게 된 것은 모두 그 아이 때문이 아닌 가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참으로 열심히 재일동포들을 위해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일본 전역에 민단이라는 단체를 통해 산하 기구로 한글학교를 만들도록 안내하고 연수하면서 일본 내 한글학교 설립의 산파역을 했습니다. 매년 일본 전역에서 8월에 교육관계자들 250여 명 정도가 한 자리에 모여 민족교육을 논하는 재일본교육연구대회에서 2회에 걸쳐 한글학교 개설의 중요성과 방법, 교육과정 운영, 모집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안내했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한글학교 운영에 대해 안내하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변화되고 글로벌화 된 세계에서 민족교육은 한글학교에서 담당하고 이루어져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정규교육은 그 지역의 정규학교에서 배워서 그 지역의 중심사회로 진출하고 가슴속에는 한민족의 정서와 문화가 흐르고 있음을 교육하는 방향으로의 민족교육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국적이나 핏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행복한 삶을 개척하는 역량을 스스로의 힘으로 익혀 현지에서 주류사회로 성장하되 가슴에는 대한민국을 품는 민족교육이야말로 지금 시대의 진정한 민족교육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대학인 코리안 아카데미에서 저는 일본 유수 방송의 한국관련 코너 아나운서를 배출하기도 했고, 동경 입국관리국 소장을 비롯한 도청, 구청 직원들의 한글 공부, 방위청 간부들의 한글 지도까지 우리 동포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한글이 필요한 사람이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지금이야 문체부에서 세종학당도 개설하여 지원하고 있고, 재외동포재단(외교부), 교육부 등에서도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어 많은 기관이나 단체에서 한글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초창기는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헌신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했었습니다.

생활고를 겪으면서까지 오로지 민족교육, 한글교육에 봉사했고 몸을 바쳤습니다. 지금의 화려한 시설과 많은 지원 속에 한국어교사라는 자격증까지 번듯하게 걸어놓고 교육하는 기관, 시설, 교직원을 볼 때 초창기 고생하고 오직 마음으로 헌신했던 옛 생각들이 스쳐가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합니다. 초창기의 고생과 헌신들이 헛되지 않게 평가받고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해 보는 것은 그 때 그 당시 너무나 열악하고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충성심 하나로 온 몸을 던져 몸으로 실천했던 고생 때문일까요? 

그렇게 전쟁 같던 시간들이 흘러 나의 생활도 조금은 안정이 되고 일본에서 괜찮은 직장을 얻어 몇 년을 더 근무하던 어느 날 상담을 요청받고 직장 주변 찻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기쁨이었습니다. 놀람 그 자체에 몸이 굳어버렸습니다. 꿈에서도 그리던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거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빛이었습니다. 꽃이었습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온몸이 떨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주변이 눈에 들어올 때쯤에는 둘이가 서로 울고만 있었습니다. 20 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기쁨도 잠시 너무 먼 길을 돌아와 버렸다는 현실에 서로가 할 말도 못하고 가슴만 쥐어뜯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있다가 헤어졌습니다. 그 뒤 몇 번의 연락은 더 있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무엇이 그리도 무서웠는지, 무슨 벽이 그렇게도 높았는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도 못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소식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나에게 한글을 배우던 그 중1학생은 지금은 케이요 대학을 졸업하고 재일동포들을 위한 인권변호사가 되어있습니다. 소외되고 억울한 재일동포들의 눈과 귀가 되겠다고 지금도 열심히 일본 전역을 누비고 있습니다. 매년 5월 15일 스승의 날이면 한국에서는 애물단지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나에게서 배웠던 토요학교(한글학교) 제자들, 코리안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성인 제자들은 한국의 문화를 알고 수 십 명씩 직접 쓴 손편지를 보내오기고 하고 예쁘게 만든 카드를 보내오기고 하며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한국에서 교직 생활을 20여년간 했었고 일본으로 건너와 가르치는 일을 21년째 하고 있는데 가르침의 보람은 일본에서 더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다시 한 번 중학교 때 그 아이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저곳을 수소문 해 보았지만 소식이 닫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 번씩 가슴 한 쪽이 텅 빈 느낌은 그 아이의 자리일까요? 이제는 살아가야 할 날보다 살아 온 날이 더 많겠지만 우연이라도 다시 한 번 마주쳐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도 그 때처럼 비가 오고 있습니다. 이런 날이면 잊고 있던 그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