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미얀마] 한글세계화운동연합 김균배 본부장, ‘너도 행복하게 나도 행복하게 미얀마가 행복하게’ 한글로 선교하는 현장의 목소리

김균배 2020-11-22 (일) 09:53 3년전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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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세계화운동연합 김균배 본부장, 최기숙 부본부장은 부부이다.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934월의 일이다.

OM국제선교회 선교사로 아프리카 수단에서 단기 사역의 작정 기간 2년 반 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던 귀국길이었다. 영국 런던에 들렸던 나는 지인의 소개로 한 교회에서 주일예배 시간에 간증을 하게 되었다. 그때 버마 출신의 선교사가 다가왔다.

 

할렐루야 킴, 내 조국 미얀마에는 예수를 전하는 선교사가 아무도 없습니다. 코리아로 가지 말고 나와 함께 미얀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 주세요.”

 

버마 출신 선교사의 이 한마디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렸다. 그때 그 음성은 버마출신의 선교사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음성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의지할 데라고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인, 외롭고 고독한 사명의 길을 걷기 위해, 1995년 직전으로 내려쬐는 태양빛조차 무덥던 8월 양곤에 첫발을 디뎠다. 두 달 후 아내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물도 설고 땅도 설은 낯선 땅으로 찾아왔다. 양곤 공항에서 상봉한 우리 가족은 눈물로 얼굴을 얼싸안았다. 그때부터 한글로 사역에 붙을 지피기 시작했다.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 대륙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서쪽은 인도와 인도양, 북동쪽은 중국, 동쪽은 태국, 라오스에 접해있다. 1885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아시아의 거점이 되었고, 194814일 영국에서 독립할 때, 국호를 버마연방(Union of Burma)이라고 했다. 그 후 1989년 국호를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으로 개칭했고, 201011월 미얀마연방공화국(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으로 다시 개칭했다. 그래서 미얀마의 정식명칭은 미얀마연방공화국(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이다.

 

미얀마는 135개의 다인종권, 다문화권, 다언어권 국가이다. 영국에서 독립 후에는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했다. 하지만 1962년 쿠데타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가 등장했다.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합(NLD)이 압승하였으나, 군사정부는 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군부독재 체제를 유지했다. 2006년 수도를 양곤(Yangon)에서 밀림지대인 핀마나(Pyinmana)로 옮기고, 이름을 네피도(Naypyidaw)로 바꾸었다. 행정구역은 버마족이 거주하는 7개 구획(divison, taing)과 소수종족이 거주하는 7개 주(state, pyine)로 이루어져 있다.

 

미얀마는 불고 종주국이었다. 기독교 복음의 불모지에서 나는 앞길이 캄캄했다. 한국파송 1호라는 밀알이 되어 불교나라에서 기독교 선교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군부독재 시절부터 외국인에게 굳게 닫쳤던 선교의 빗장을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차근차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 불교의 종주국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흰두교 등 세계 4대 종교가 공존하는 다종교권 국가로 변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얀마는 50여년의 긴 시간을 사회주의 군부독재 치하에 놓여 있다가 자유 개방의 물결을 접 한지, 이제 겨우 5년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사역이 힘들 때마다 요한복음 1224절을 생각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성경구절을 생각했다. 성경을 알지 몰랐던 우리나라를 생각했다.

 

조선의 최초 밀알은 영국의 토머스 선교사였다. 1865년에 한문성경을 달랑 들고 황해도 해안에 상륙했다. 백령도를 비롯하여 황해도와 평안도를 순회하며 전도를 하다가 순교를 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두 번째 뿌려진 밀알은 호주의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였다. 1900년도에 한문성경과 전도지, 판매용 마가복음을 들고 우리나라에 선교를 왔다. 그는 주로 부산과 경남지방을 선교하다가, 서울에서 보낸 5개월간 한국어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그가 호주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조선말(Chosen Mal) 공부에 바빠 가족들에게 편지 쓸 시간조차 없다고 했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 데이비스의 한국어 실력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5개월이 지난 후에는 일상어는 물론, 설교까지 한국어로 했다. 그가 순교한 후에 이변이 일어났다. 그의 나라인 호주에서 해방 전까지는 78, 해방 후에는 약 120명의 호주 선교사가, 대거 한국으로 들어오는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세 번째 밀알은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그는 과천, 수원, 용인 서울을 중심으로 선교했다. 언더우드는 데이비스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자신이 만난 선교사중에서 가장 가슴이 뜨거웠으며, 예리한 지성을 겸비한 우수한 선교사였다고 평한 데이비드는 언더우드의 인품과 실력과 능력을 신뢰했다.

 

네 번째 밀알은 미국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였다. 그는 아내 D.엘라와 함께 188545일 인천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입국했다.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한국의 교육발전에 헌신했다.

 

나는 선교가 힘들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순교한 선교사들을 생각했다.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날마다 발이 부르트도록 한글로 복음을 전하며 기도했다. 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세워 한국어와 영어로 문맹을 깨우쳐준 것처럼, 인재를 양성해서 문물을 겸비해준 것처럼, 병원을 세워서 심신을 치료해준 것처럼, 미얀마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 것인지 고민했다. 한 알의 밀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땅에 떨어져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