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우 수필] 비밀의 방<풀씨(장디씨)훑기>17

이훈우 2020-09-07 (월) 07:58 3년전 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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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우/ 일본동경한국학교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 본부장

야호! 방학이다!’

아이들은 모두 좋아서 만세를 부르며 허리에 책보자기(당시는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아이는 한 두 명뿐이었고,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메고 다녔다)를 둘러메고 후다닥 교실을 빠져나갑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바닥이 땅에서 1미터 정도 떠 있고 외벽이 모두 기름을 입힌 나무로 되어 있는 오래된 학교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을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내가 1학년 때는 600 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제법 큰 학교였는데, 해가 갈수록 학생들이 줄어들어 6학년 때는 200 여 명의 학생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폐교가 되어 그 넓은 운동장은 콩을 재배하는 밭으로 변해있습니다

 

여름 방학이면 아이들 모두는 즐겁고 신이 납니다. 숙제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숙제를 한다는 자체가 이상하게 생각되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부모님 농사일을 돕느라 시간이 없어서 숙제를 못 한다는 이유가 통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꼭 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가 세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식물채집이고 또 하나는 동물채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풀씨(잔디씨)를 훑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동물채집과 식물채집은 왜 그렇게 강조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풀씨를 훑어가는 이유는 어른이 되고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잔디 씨는 쌀보다도 몇 배 비싸게 팔렸다고 합니다. 한국의 잔디는 원래 ()’로서만 번식을 시킬 수 있는데 한국의 한 과학자가 씨앗(장디씨)으로 번식하는 방법을 개발했고, 미국에서 한국의 잔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바람에 비싼 값으로 수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잘 사는 안마당의 조경용이나 묘지의 봉분을 마감할 때 사용되던 것이 외화 벌이를 위해 각 학교에도 배당량이 배정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온 국민이 함께 잔디씨를 훑었고 학교에서도 정해진 목표량만큼 수매를 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래서 방학 때 숙제로 제시가 되었고 학생들이 숙제를 잘 해 와서 다행히 목표량을 채우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방학이 끝나기 무섭게 고학년을 중심으로 수업은 접고 산으로 들로 잔디씨를 훑으러 가야만 했습니다.

한 때는 쥐꼬리를 끊어서 제출하기도 했었고, 잔디씨 다음에는 질경이 씨를 모아서 제출하기도 했었습니다. 요즘이야 상상도 못하겠지만 당시는 애국애족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에서 내리는 명령에 대해 누구도 대들거나 항거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꿈같았던 이야기들이 지금은 모두가 이루어지고 성취가 되어서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어, ‘딸 아들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에 앞장서자.’, ‘오늘은 쥐 잡는 날’, ‘우리 모두 간첩 신고’, ‘반공 교육’, ‘삐라를 신고합시다!’, ‘식량 자급자족 달성하자-통일벼’, ‘혼분식 장려’, ‘낙곡 줍기 운동등의 단어들이 떠오릅니다만 지금은 생소한 말들과 이야기들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 농담으로 건네던 말 들 중에 나중에는 물도 돈 주고 사 먹어야 할 거야.’, ‘전화도 텔레비전도 들고 다니며 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거야.’ 라는 말들이 있는데 당시에는 황당하고 정신 빠진 말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 참 신기합니다. 그 외에도 몇 십 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은 너무나 많이 바뀌고 발전한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공부를 하지 않고 풀씨를 훑으러 가는 날이면 우리는 그저 신이 납니다. 학교를 떠나 모처럼 들판의 공기를 마시는 일도 신나지만 무엇보다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즐겁게 합니다. 나간 김에 낙곡을 줍기도 하고 시골 아이들만의 재미있는 놀이도 하는 시간들이 우리는 너무나 즐겁고 신나게 했었습니다. 특히, 6학년 때의 우리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셨었습니다.

소풍, 수학여행의 추억을 제외하고서라도 대도시에서 금방 발령받고 오신 총각 선생님이었던지라 뭔가 신나는 일들은 많이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만들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처음 담임이 되고 조금 서먹한 마음이 사라진 3월 말에는 갑자기 병아리를 키우자고 제안을 해 오셨습니다. 수학여행 경비로 쓰자고 하시면서 병아리 살 돈을 내 놓으셨던 것입니다.

당시 학급 대표였던 나는 시장에 가서 예쁘고 활발한 병아리 10마리를 사 왔고, 우리 모두는 학교 구석에 병아리 우리를 만들어 돌아가면서 돌보기 시작했었습니다. 제법 잘 자라주어서 7월에는 중닭이 되었는데 여름방학 장마를 이기지 못하고 한 마리도 남김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병아리를 잘 돌보지 못한 죄책감과 불쌍한 심정에 모두가 눈이 붓도록 울었었습니다. 지금도 아픈 추억 중의 하나로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잔디씨를 훑다가 지겨우면 선생님 몰래 도라지도 캐 먹고, 칡도 찾아서 뿌리를 먹곤 했습니다. 비가 온 뒤면 각 종 버섯도 지천으로 깔려 있어 손쉽게 따곤 했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먹을 수 있는 것과 독이 있는 것을 선생님보다도 더 잘 구별합니다. 그래도 지겨우면 잔디씨가 달린 줄기를 뽑아서 서로 마주 걸고 끊어먹기 대결을 합니다. 벌칙은 당연이 개미 똥구멍을 빠는 일입니다. 커다란 병정개미를 잡아서 엉덩이를 살짝 누르면 투명한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립니다.

아주 작지만 그것을 혓바닥에 떨어뜨리면 1초 정도 정신을 잃습니다. 아주 강한 산성이면서 마취제 성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나쁜지 안 나쁜지는 모르지만 그 찌릿함에 그것을 벌칙을 대신했던 시골 아이들이었습니다. 새 둥지를 터는 아이도 있고, 고구마 밭에서 남겨진 고무마를 찾는 아이도 있습니다.

시간이 가고 학교로 돌아올 때쯤이면 잔디도 잔디씨지만 여러 가지 부산물들을 많이 모아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이겠지만 당시는 큰 비판이나 저항 없이 당연한 것처럼 인식하고 그러 그렇게 이루어지고 실시되어지고 있던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도 한 번씩 골프를 나갈 때면 잘 가꾸어진 필드의 잔디를 보면서 예전 초등학교 시설 잔디씨를 훑던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