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우 수필] 비밀의 방, 장날2 ⑬

이훈우 2020-08-05 (수) 09:08 3년전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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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우/ 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본부장

 
 
  ‘히야! 다 온 기가?’
  ‘그래, 저어기가 장터대이!’
  ‘우와! 사람들 좀 봐. 사람들이 천지삐깔이야, 히야!’  동생이 들뜬 소리를 지르며 장터로 달려갑니다.

 동물들 새끼들을 모아서 파는 곳, 식물 종자와 새싹을 파는 곳, 날짐승들을 구해다 파는 곳, 들짐승을 잡아다 파는 곳, 푸줏간, 어물전, 잡화점, 국밥집, 떡집, 과일 자판, 반찬 집, 장독 파는 곳, 강아지 파는 곳, 장난감 파는 곳, 엿장수, 야바위꾼, 약장수, 뻥튀기 아저씨, 장똘뱅이 아저씨, 여러 난전의 아줌마들 그리고 장보러 온 사람들….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세상 모든 것이 다 모여 있는 곳이 장터이고 장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온 ‘안계’장은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도 있는 아주 큰 장터입니다. 신기한 세상에 온 것처럼 동생과 나는 시장의 이 곳 저 곳, 이 것 저 것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연우아, 국밥 먹제이, 히야캉 이리로 와라.’
  쟁반에 정구지(부추)를 깔고 그 위에 수북하게 담은 돼지고기 수육,  단단한 배추, 큼지막한 고추, 생마늘 그리고 된장과 막걸리 한 사발, 국밥 두 그릇과 시골김치가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막걸리 한 사발에 수육을 드시고 동생과 나는 국밥을 먹었습니다. 국밥 속에도 고기가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뼈를 넣고 오래오래 우려낸 국물에 콩나물과 씨레기, 토란대를 듬뿍 넣고 끓인 국밥은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면서 국밥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해치우고 어머니를 쳐다보니 어머니는 우리 마음을 알아차리시고는 배추전 하나를 더 시켜주셨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은 시장에서 볼 일을 더 보고, 나만 먼저 집으로 가서 오전에 못 했던 일들을 하기로 했습니다. 오후 1시의 시골길은 한적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오전 일을 마치고 모두 낮잠을 자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까지도 이 시간이면 낮잠을 즐깁니다. 한여름의 태양만이 이글거릴 뿐 온 세상이 모두 고요함 속에 묻혀있습니다.

간간히 어미 제비들이 어린 새끼들의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낮게 날며 사냥을 하고 있고, 먼 산에서 한 번씩 들리는 수꿩의 울음소리와 날갯짓 소리 그리고 길가 미루나무에서 짝을 찾는 매미들의 구애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입니다. 나는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라 서둘러 뛰다시피 걷고 또 걸었습니다.

온 몸에 땀이 흐르고 피곤이 몰려왔지만 빨리 집에 가서 오전에 못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한참을 더 걷다보니 하늘이 노랗게 보입니다.
  ‘아…, 동생과 같이 올 걸….’
  ‘아버지는 집에서 뭐 하고 계실까? 마중이라도 나와 주시면 좋은데….’
  너무 힘이 들어 정신이 혼미해져서 좀 쉬고 가려고 할 때쯤
  ‘훈우야, 이 할미가 마중 나왔다. 이리로 오렴’
  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반가웠습니다.
  ‘할메! 이제 오면 어떻게 해? 일루 빨리 와 빨리!’
  ‘아이고 우리 새끼 온 몸이 땀이네. 미안하다 내가 늦었제?’
  할머니는 나에게 따라 오라고 손짓하면서 앞서 걸으셨습니다.

나는 너무 좋았습니다. 힘이 막 솟았습니다.
  ‘얘야, 여기는 개울이다. 옷을 좀 걷어 올리렴’
  난 짧은 반바지 차임이었지만 옷을 걷어 올리고 할머니 뒤를 계속 따라갔습니다.

조금 뒤 할머니는
  ‘얘야, 여기는 가시덤불이란다. 옷을 내려라, 가시에 찔릴라.’
  ‘알았어, 할메! 근데 아직 멀었어?’
  ‘한 참 더 가야해, 천천히 따라오렴.’
  ‘알았어, 할메!’
  난 할머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길을 걸었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힘들었던 피로는 어디로 가고 힘이 펄펄 솟았습니다.

개울을 걸 널 때는 옷을 걷고, 가시밭길을 지날 때는 옷을 내리고 걸었습니다.

얼마를 그렇게 걸었는지 모릅니다.
  ‘야야! 너 아직 여기가? 집에 가도 벌써 갔어야지. 여기서 뭐 하고 있노…?’
  ‘할메는?’
  ‘할메라니, 야가 미쳤나? 너거 할메 세상 버린 지가 언젠데…?’
  ‘…!’
  기억이 났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제가 2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는 어른들이 목 놓아 우는 이유를 몰랐었습니다. 한참 뒤에서야 할머니는 우리 곁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죽음의 의미를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할머니가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간절히 간절히 누군가 마중 나와 주기를 바랐을 때 할머니는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가시밭길에서는 옷을 내려주시고, 개울에서는 옷을 걷어주시며 나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걸어주셨습니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야야, 쓸데없는 생각 말고 빨리 집에나 가자, 아부지 화낼라…’ 
  어머니의 재촉에 집을 향해 걸었습니다.
  ‘어무이, 아까 내가 혼자 뭐 하드노?’
  ‘멀리서 봐서 잘은 모르겠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데…?’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개울을 건널 때는 옷을 걷고 가시밭길을 걸을 때는 옷을 내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중얼중얼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랑 아야기했노?’
  ‘할메랑 했다니까, 진짜 할메가 여기 와 있었어.’
  ‘야가 와 이카노? 진짜 미쳤나보네, 여기 할메가 어디 있노? 아부지 화내기 전에 어여 집에나 가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어머니 뒤를 따라 걸었습니다.
 ‘분명히 할메가 왔었는데….’             

(장날3에서 이어집니다)